[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신년 강물 앞에서 작년 다리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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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3-0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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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새해 첫날 저녁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임진강역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지라 적요함이 가득하다. 혼자 근무하던 역무원께서 관광객인 우리를 위해 퇴근시간을 늦추고 있다. 경의중앙선 전철역 종점에서 막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임진강역과 문산역을 오가는 셔틀전통열차다. 평일에는 오전 두 번 오후 두 번, 주말 그리고 공휴일에는 오전 6번 오후 6번 다닌다고 친절한 안내판이 알려준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 후 2001년 완공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존재감을 자랑했다. 2020년 전철이 연장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역으로써 기능을 하게 되었다.

 

[임진강역 저녁노을]

 
인근에는 철도종단점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씨가 새겨진 기념물이 있다. 달리고 싶다고 외치던 그 철마기관차는 만신창이가 된 채 70여년 동안 그대로 서 있다.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4년 등록문화재 78호로 지정되면서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녹슨 때를 벗겨내고 현재 위치로 이동하여 전시 중이다. 당시 기관사이던 한준기(1927년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12월 전쟁물자를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하여 장단역에 도착했을 무렵 피격을 당해 탈선되면서 버려졌다. 천여개의 총탄자국과 휘어진 바퀴가 전쟁참상을 그대로 전해준다. 장단역 내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재활용한 기차길도 설치하여 현장감을 살리고자 했다. 철원 월정리 역에는 한국전쟁을 함께 치룬 객차 잔해가 남아 있으니 그 둘을 조합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증기기관차 잔해 부분]


기차건 역이건 철로건 모두 이동을 전제로 한 운송시설이다. 거기에는 다리가 빠질 수는 없다.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이 완공되면서 임진강 위로 상행(서울방향) 하행(신의주 방향)용 다리 두 개가 각각 건설되었다. 기술부족인지 지형상 애로 때문인지 몰라도 한 개의 다리로 상하행선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부산에서도 경성가는 노선을 상행선이라 불렀고 신의주에서도 경성가는 노선을 상행선이라 불렀다. 경성(현재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인 까닭이다. 지형상으로는 평양으로 올라간다고 해야할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은 평양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하지만 6.25으로 인하여 오십여년 만에 두 다리는 교각만 남긴 채 폭격으로 끊어진다. 휴전을 앞두고 하행선인 신의주행 서쪽다리는 필요성에 의해 복원된다. 철로가 아니라 일차선 도로였다. 1953년 전쟁포로 교환을 위한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다. 교각 끝은 강변의 고수부지 그리고 늪지였다. 복구된 철교의 남쪽 끝에서 가장 짧은 거리인 사선(斜線)으로 꺾어진 임시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온 후 걸어서 임시 다리를 통해 일만여명이 넘어왔다. 그 뒤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했다.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는 주재료가 목재다 하지만 교각의 기둥을 만들면서 통나무 4개를 튼튼하게 묶다보니 약간의 철골부재가 더해졌다. 6개 교각을 가진 다리의 총길이는 83m이며 높이는 8m 폭은 4.5~7m이다.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피폐화되었지만 화해시대를 맞이하여 1995년 복구되었다. 1996년 문화재(경기도지정기념물 제162호)로 지정했고 2000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현재 안보관광지로서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두 다리 가운데 동편에 있는 다리는 완전히 잊혀졌다. 하지만 잊는다고 해서 잊혀지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그 기억은 다시 소환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2016년 부서진 기관차 복원을 시작점으로 하여 중간 쯤에는 체험형 객실을 재현했고 마지막 부분에는 5개의 교각 위로 임진강 경관을 자유롭게 조망할 수 있는 105m 폭5m 통유리형 관광용 시설을 만들었다. ‘통일되면 없어질 다리’라는 별명도 붙였다. 정식명칭은 순우리말인 ‘독개다리’다. 인근의 독개마을은 없어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다리이름이 된 것이다.
 
인근에 남북회담으로 유명한 판문점은 본래 ‘널문리’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한자식 표현인 판문점(板門店)으로 바뀌었다. ‘판문점은 당일견학이 불가하며 온라인으로 사전예약하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판문점 남북공동경비구역(JSA)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유명하다. 가게 된다면 전통한옥 건물인 25평 무량수전도 참배해야겠다. 육이오 희생자 위패를 모신 곳으로 2017년 완성했다. 곁에는 군법당 ‘영수사’가 있다. 2004년 미군숙소 건물을 개조하여 사찰로 이용하고 있다.
 
분단의 상징이자 냉전시대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지역에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새로운 ‘통일대교’가 1998년 완공되었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다. 본래 있던 철교는 기차통행을 위해 레일을 다시 깔았고 잠시나마 임진각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운행길로 사용했다. 한 때 남북교류로 왁자지껄했던 두 다리 주변은 현재 고요만이 가득하다. 그 적막함도 언젠가는 다시 분주함으로 바뀔 날이 오리라.
 
금기불여석(今旣不如昔) 후당불여금(後當不如今)
현재가 옛날만 못한다면 장래도 현재만 못할 것이다(종용록 53칙)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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