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기인] ㉒ 임혜숙 교수 "美·中 기술패권 경쟁서 韓 위치 고민 시급…20년 뒤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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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철 기자
입력 2022-11-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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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디지털 플랫폼·서비스 홍수…'법규 미비' 숙제

  • "전 정부 과기정책 지속 중…디플정 성공 바란다"

  • 대기업 중심 반도체 한계…설계인력·기업 키워야

  • "신산업 R&D 집중 아쉬워…기초연구 예산 늘길"

  • 장관 때 '다양성' 강조…"여성 고위공직자 나와야"

임혜숙 이화여대 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국가가 보유한 기술 역량이 국제무대 위상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기술패권 시대다.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 중 약 4분의1이 과학기술과 관련돼 있다.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역할 확대 요구에 호응하고 지원한다는 정부의 의지를 나타낸다. 본지는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20주년인 올해 연간기획으로 시작한 여성과학기술인 릴레이 인터뷰 마지막 주자로 임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와 만났다.

임 교수는 현 정부가 과학기술 관련 국정 비전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한국만의 역할을 고민하고 20년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 정부부터 추진된 과학기술·디지털 분야 정책이 현 정부에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어 긍정적이나, 향후 정부가 민간의 혁신 역량을 폭넓게 수용하고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규모 대비 자율성이 떨어지는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임 교수와 일문일답 내용.

-1998년 한국 정부 차원에서 IT 강국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지 24년이 지났다. 산업, 연구, 인재, 국가정책, 국민 인식 면에서 오늘날 한국의 실제 수준을 어떻게 보나.

"장관으로 있을 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 가서 많은 나라가 우리 정보기술(IT)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가 그간 추진해 온 IT 관련 정책이 적절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우리나라 젊은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가 자기 취미와 재능에 맞는 일자리를 찾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고 본다. 여전히 풀 문제는 있다. 인터넷 플랫폼과 새로운 서비스가 많이 나오는데 법규가 미비할 때가 많다. '강남언니'처럼 성형수술 관련 병원과 이용자를 연결하는 서비스, '로톡'처럼 변호사와 법률 서비스 이용자를 연결하는 서비스가 나오면 법률적·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게 안 돼 문제가 되는 사례가 있다. 기존 산업 종사자의 일자리를 빼앗는 사례도 있고. 그런 점에서 앞으로 해결할 문제가 있다. 최근 소프트웨어(SW), 반도체 등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정책이 많이 나오는데 시의적절하다고 보고 잘 추진하면 좋은 결과를 거둘 것으로 생각한다."

-과학기술, 그리고 IT 또는 디지털 기술이 사람들에게 왜 중요한가.

"많은 나라가 과학기술을 가지고 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과학기술을 갖지 못한 나라는 국제무대에서 다른 나라가 상대해 주지 않는다. 그 나라에만 강점이 있는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국제무대에서 다른 나라와 협력하지 못한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짓는 시대에 와 있다. 디지털 기술 관점에선 산업 디지털 전환뿐 아니라 각 개인도 디지털 기술을 모를 때 일상에서 불편을 겪게 된다. 우리가 '디지털 대전환 시대'라는 말을 하듯이 더 많은 가능성, 일자리가 디지털 산업에 있는데 그것에 대비하지 못하면 격차가 더 벌어진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기술, IT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디지털 기술 영역에서 보더라도 국제적인 역학 관계상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다. 그 사이에서 차별화를 잘해야 할 것 같다. 한쪽에 쏠려선 생존하기 어렵고 양쪽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본다. 국민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고령층의 디지털 기술 역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통계적으로 굉장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과기정통부가 주도한 대표적인 사업이 공공시설에 고령층과 취약계층을 모시고 디지털 기술을 경험해 보도록 돕는 '디지털 배움터'인데, 더 확대하고 홍보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 디지털, 과학기술 분야 정책 기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장관 재임 당시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나.

"전 정부가 앞세운 디지털 뉴딜, 5G 플러스, 5G 특화망 등 주요 '모토'를 다 버린 것 같지만 해당 정책 자체는 연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전 정부가 선정한 10가지 '필수전략기술'을 이 정부에서 12가지로 확장했다. 이렇게 과학기술 정책이 (정권 교체 이후에도) 연속성을 갖는 것이 좋다. '디지털플랫폼정부'를 앞세운 것도 마땅히 나아갈 방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이나 디지털 플랫폼 산업은 세계에서 앞서고 있다. 민간 산업과 연계해 디지털플랫폼정부가 성공했으면 좋겠다. 정부가 직접 구축하지 않고 이미 민간에 있는 많은 서비스를 공공에 연결해 주면서 국민과 기업이 수혜를 보도록 하는 게 좋지 않나 생각한다. 클라우드 서비스도 정부가 별도 구축하는 데 노력을 쏟기보다 민간의 것을 그대로 활용하면 좋겠다. 그래야 시의적절하게 업데이트, 업그레이드되고 확장성도 있을 것이다."

-장관 재임 기간에 과학기술·디지털 부총리 신설 의지를 갖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왜 필요하다고 보나.

"과학기술 부총리제가 갖는 의미를 (장관이 되기) 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일을 해 보고 나서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백신 예약 시스템을 예로 들어 보자. 질병관리청과 보건복지부가 백신예약시스템을 관리했다. (전 국민 대상 접종을 시행하면서) 너무 많은 접속이 몰려 시스템이 다운됐고 많은 국민이 불편을 겪었다. 과기정통부가 나서서 백신 예약 시스템을 개선했다. 과기정통부는 그동안 민간 기업과 협력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단기간에 네이버, 카카오, LG CNS, 이런 회사와 협력해 백신 예약 시스템을 개선했고 국민 불편을 해소했다. 앞으로 디지털 전환 시대에 조선, 제조, 농업, 자동차 등 모든 산업마다 디지털 기술이 접목돼야 한다. 과기정통부가 각 산업에서 디지털 전환이 일어나도록 해당 부처인 해양수산부, 산업통상자원부, 농림축산식품부, 국토교통부 등과 협력해야 한다. 각 부처 협력을 이끌고 각계 디지털 전환을 실현하려면 부총리제가 필요하다. 과기정통부가 일개 부처로서 이들과 협력하기보다 각 부처를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시너지를 내기 용이하다. 중국도 시진핑 정부가 이어지면서 과학기술 분야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 요직을 맡은 경우가 많은 점에서 보더라도 과학기술을 강조하고 있고 미국은 반도체특별법을 만들면서 과학기술, IT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법률적으로 과학기술 관련 부처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과학기술 중심 국정운영, 전략기술 육성,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정부에서 확보된 기반은 무엇이고, 이 정부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전 정부는 상당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한 디지털 뉴딜 정책을 통해 인공지능(AI) 학습용 데이터를 구축하고 새로운 인력도 양성했다. 산업계, 연구계에서 많이 호소한 AI 학습 데이터와 인재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앞으로는 5G 이동통신망에서 28㎓ 대역 주파수를 어떻게 활용할지, 넷플릭스와 같은 사업자가 (통신사와 갈등 중인) 망 사용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런 과거에 없었지만 계속 나타날 새로운 문제를 어떻게 정책적으로 잘 풀어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국과 중국 간 기술패권 경쟁에서 우리나라 위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내가 과거 미국 기업 연구소에서 반도체 설계 업무를 했던 20여년 전만 해도 대만의 반도체 설계 관련 산업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굉장히 많이 발전했고 미디어텍과 같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팹리스 회사도 탄생했다. 이는 대만 정부가 팹리스 회사를 밀어주고 인력을 양성해 공급하는 등 정책으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우리도 반도체 설계 인력을 양성해 산업계에 공급하고 미디어텍처럼 클 수 있는 팹리스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미래가 있다. (반도체 산업이) 대기업 중심으로 가면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임혜숙 교수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정부 예산안 기준 내년 국가 R&D 예산 규모가 30조7000억원에 달하고 이는 30조 미만인 올해보다 최소 수천억원 늘어나는 수준이다. 늘어난 예산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우리나라 정부 정책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 신산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양자 같은 분야에 편성한다든지. 그런데 양자 연구를 직접 수행할 인력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당장 필요한 수준에 비해 과도한 측면도 있다. 나는 기초연구 예산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기초연구 저변을 확대하고 거기서 나온 풀뿌리 기술이 앞으로 빛을 보도록 지원하면 좋겠다. 연구비가 많이 늘었다고 하나, 실제 대학 연구소 현장에선 연구비가 없어 하고 싶은 연구를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이 미국처럼 기술 선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국가 R&D 투자나 대학 연구 환경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나.

"한국 R&D 투자 규모는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한다. 그런데도 국내 R&D 투자 대비 결과물이 미국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미국은 '신뢰 사회'인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미국은 제안서를 쓸 때 간단하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연구 방법만 제시하면 된다. 이를 믿고 연구 예산을 배정하면 특별히 문제가 없는 한 자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신뢰가 바탕에 있다. 우리나라는 연구자가 국가 예산을 받아 연구할 때 불필요한 행정 처리와 규제가 너무 많다. 아직도 자유로운 연구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또 우리나라는 국가가 연구 주제를 너무 엄격하게 정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주제가 '대박'을 칠 수 있는 연구일지는 사실 누구도 모르지 않나. 연구자가 자신의 열정을 좀 더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란다. 자율적인 연구 환경, 연구자를 믿고 신뢰하는 환경으로 가면 좋겠다. 대학 차원에서는 연구 역량이 뛰어난 교수들이 여러 대학에 포진해 있는데 이들에게 충분한 석·박사 연구 인력이 제공되지 않고 특정 대학에 쏠리는 현상이 해결돼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교수들은 연구실에 직접 지도할 수 있는 적정 규모 학생을 받고 학생들은 학교 브랜드나 어떤 서열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와 연구 환경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전환돼야 한다."

-일각에 한국 AI 경쟁력이 다른 나라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는데 동의하나.

"AI 전공자가 아니라 글로벌 대비 우리나라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전반적인 AI 분야 연구 흐름은 대규모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과거 GPU 몇 대 써서 하던 연구로는 경쟁력이 없고 훨씬 많은 GPU를 사용해 훨씬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많은 (인공신경망) 레이어를 쓰는 초거대 AI를 연구하는 것이다. 일개 대학교수로서는 그만한 연구시설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어렵고, AI 연구 자체가 많은 연구자가 모여 규모를 키워서 집단 연구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AI 대학원과 각계 연구 센터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아직 성과가 충분히 나오지 않는 초기 단계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국에선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해 초거대 AI 연구를 이끄는 것으로 안다. 앞으로 국내서도 AI 관련 집단 연구, 산업계 AI 투자가 더 크게 일어나 점차 성과가 나올 것이다."

-과기정통부라는 대한민국 정부 부처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과기정통부 산하 세 차관이 과학기술, 정보통신, 대형 국가R&D 관리와 계획 등을 잘 정리해 추진하는 구조로 돼 있고 모두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과학기술 분야에 얼마를 투입해 연구할지 방향을 정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정보통신기술 관련해서도 기초연구보다 산업계와 밀접하게 관련돼 신산업을 일으키고 새 서비스를 개발해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도 과기정통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과학기술 패권 시대가 돼 가는 국제 정세상 미래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대형 R&D 주제는 무엇인지 검토하고 각 부처 연구과제를 심의하는 역할도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과기정통부가 큰 그림을 보고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그런 계획을 만들어나간다면 좋겠다."

-공학 연구자로서 학계 생활을 오래 했는데 낯선 공직에 도전할 결심을 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앞서 교수가 되고 오로지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의지로 10여년을 살아왔고 학교에서 교무처, 공대 학장 등 보직을 맡게 됐다. 학장이 되니 내가 좋은 논문을 쓰는 것보다 우리 교수들이 좋은 논문을 더 많이 쓰도록 좋은 인재를 연구 인력으로 영입하고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 게 더 영향력이 큰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전자공학회장을 맡았을 때도 해외 연구자를 초청해 국내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국제 공동연구 기반을 만드는 등 학회장 하나도 이런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어떤 기관장이나 조직장을 맡아 연구자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내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게 됐다. 기관장들이 어떻게 선정되고 정책적인 연구 주제는 어떻게 결정되는지 공부를 좀 해 봤고 6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이사장 후보자 모집 공고가 나서 지원했는데 놀랍게도 선임이 됐다. 가서 석 달을 일했는데 인사수석실에서 '(과기정통부) 장관 후보로 검증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국가과학기술이사회 이사장은 열심히 준비해 쟁취한 자리였지만, 거기(장관직)까진 계획하지 않았는데 우여곡절 있었지만, 검증을 받았고 장관이 됐다. 이사장직을 완수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을 고민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나 생각도 했고 내 역량을 발휘해 잘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관장을 그만둘 만큼 충분한 이유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우리나라 여성들이 꿈꿀 수 있는 한계를 넓힌다는 데 의미를 둔 것도 있었다."

-연구자와 공직자를 모두 경험해 본 결과 두 역할에 차이가 있다면.

"좋은 논문이 미치는 영향력과 공직자로서 만든 정책이 미치는 영향력의 경중에 차이가 크다. 공직에서 아이디어를 공무원에게 잘 설명하고 현장에서 구현되게 함으로써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이 크다고 보고 이분들이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이동통신 3사가 28㎓ 주파수를 할당받아 갔는데 이걸로 전국망을 구축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진단이 나오고 활용처를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산업계에) 활용처를 찾아 제시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장된다고 공무원들에게 강조했더니 정말 활용처를 찾아냈다. 지하철이 움직이는 통로가 쭉 뚫려 있으니 이 공간을 따라서 28㎓ 주파수를 지하철 와이파이 백본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였다. 이런 경험으로 국가정책이 국민 편익 증진에 이렇게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고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산업부도 그렇지만 과기정통부에 가보니 고위급 공직자 가운데 여성이 드물었다. 여성들이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장려하고 과기정통부가 지원하는 여러 위원회에 여성과 청년들이 포함되도록 하는 다양성을 강조했다. 다양한 경험, 생각하는 분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메시지를 많이 냈다."
 

임혜숙 교수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미국에서 기업 연구원, 엔지니어로 일하다 한국에 오면서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처우에 격차가 크지 않은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국비유학생 신분이라 귀국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대학에서 후배를 가르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조건은 큰 압박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연봉을 훨씬 많이 받다가 들어오니 급여가 크게 줄어들긴 했다. 과거부터 산업계 처우가 훨씬 좋았는데 지난 20년간 재직한 대학은 교수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처우가 눈에 띄게 좋아지진 않았다. 과거 연구자들이 산업계보다 학계에서 일하길 선호하는 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고 근무에 유연성이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산업계가 더 좋은 처우에 근무 유연성도 높아지고 있다. 우수한 연구자는 점점 더 학계보다 산업계를 선호한다. 학계에 있다가 산업계로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앞으로 학계에서 우수 연구 인력을 유지하려면 연구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려면 10여년간 동결된 등록금과 같은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 분야 인재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떤 해법이 있을까.

"산업계에 부족한 것은 대부분 디지털 인재다. 새로운 플랫폼 기반 산업이 커지고 있는데 이걸 IT로 구축할 인력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대학이 그런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산업 수요는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은 (학과별) 정원 인력 칸막이나 교수 임용 문제 등 제약이 있어 그런 빠른 변화에 맞춰 따라가지 못한다. 필요한 분야의 정원을 빨리 늘려서 빨리 배출하도록 하는 대학 정원 유연성이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는 연간 300명이 통합선발 전형으로 입학하는데 1학년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원하는 전공 수업을 듣고 인재가 필요한 분야에 진입할 수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대 컴퓨터공학과, 전자전기공학과, 휴먼기계바이오공학부 등에 많이 지원한다. 이렇게 시대에 맞게 학생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부족한 것은 석·박사 연구 인력이다. 학계뿐 아니라 산업계에도 석사 인력을 요구하는 곳이 꽤 있다. 진학을 장려하는 제도가 많아지면 좋겠다. 또 정부 출연연처럼 대학에 (학생이나 교수가 아닌 교직원으로서) 연구 전문인력이 일할 수 있도록 제도가 도입되면 좋겠다. 전문적으로 연구만 수행하면서 생활이 보장되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여건이 되지 않는 실정이다."

-2025년 적용될 개정 교육과정에 초중고교 '정보' 교과 수업이 확대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그보다 훨씬 더 획기적으로 정보 교과 중요성이 강조됐어야 한다고 본다. 디지털 전환 역량은 국어 교과처럼, 국제화 시대 영어 능력처럼 생존과 연결되는 필수 역량인데 지금 시수 수준으로는 역량을 함양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수준이다. 앞으로 각급 학교는 이런 학생을 배출하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필요하고 받아들일 수준의 연구가 돼 있는지, 교과 과정이 제대로 정비돼 있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충분한 실험실습실, 교사 인력, 실습을 위해 교사를 보조할 인력을 양성하고 확보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AI 시대, 디지털 시대라고 IT를 배우려는 학생이 많은데 이들을 모두 가르칠 만큼 충분한 실습실이 준비되지 않았다. 전 사회적으로도 디지털 배움터 같은 사업으로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를 접하고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접근성을 높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편으로 다른 나라 얘길 들어 보면 5G 서비스조차 먼 미래 기술로 여기는 나라가 많다는 점에서 초고속인터넷 전국망, 5G 사용자 2000만명을 얘기하는 우리나라는 잘 해나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

-과학기술계 경력 개발, 전문성 획득 과정에 여성들이 남성 대비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있다.

"대부분 여성의 결혼, 출산, 육아와 관련된 구조적·환경적 제약과 관련돼 있다.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성들은 여전히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경력 단절을 경험한다. 육아휴직 제도 활용 여성은 많이 늘어났는데 그러면서 과거 경력으로 잘 복귀해 거기서 다시 (성장) 계단을 차례차례 밟아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많은 경우 아니다. 경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수 업무로 이탈하는 때도 생긴다. 육아휴직을 갔다 오면 업무 평가에 불이익을 받거나, 그 사이 대체인력을 뽑지 않아 부서 동료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는 일 때문에 여성들이 잘 안 가기도 한다. 재택근무 활성화를 통해 여성들에게 가장 제약이 되는 근로시간, 근로 장소의 유연성이 보장돼야 하고, 육아와 가사에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꼭 필요하다. 절대다수가 남성인 공학계에선 남성 중심 문화 안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도 있는데 그런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올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 20주년을 맞았는데 이와 관련한 정책에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우리나라는 유리천장이 뚜렷한 국가 상위권이고 OECD 기준 남녀임금 격차가 큰 나라다. 공학 계열 여성 교수 수나 공공기관과 기업의 여성 임원 수가 획기적으로 늘지 않았다. 지난 20년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야 했는데 이 법의 취지를 살린 정책 성과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본다. 대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현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 같다. 여성가족부가 하던 일을 보건복지부의 어떤 부서로 분산시켜서 하면 된다고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부처를 폐지한다는 정책을 통해 주는 메시지가 문제다. 여성가족부에서는 주요 업무였던 일이 타 부처로 이관되면 주 업무가 되기보단 뒷순위 업무로 밀려날 것이다."

-과기정통부는 여성과기인을 위해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할까.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경력을 발전시켜 기관장, 산하 조직과 대학 등의 이사회에 많이 포진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이탈을 방지할 여러 방안도 지속해서 고민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 여성과기인이 가장 애로를 느끼는 건 육아휴직에 들어갔을 때 하던 연구가 중단되고 그걸 위한 시설과 인력 등 연구 기반이 모두 없어져 돌아온 뒤에 그 연구를 재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육아휴직이 아니라 출산과 육아 기간에도 시간제 근무 등으로 속도를 조절하면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방향, 연구 보조 인력을 받아 같이 일하면서 지속해서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지원해야 한다."
 

임혜숙 교수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공학자, 교수, 여성과기인으로 앞으로 활동 목표가 있다면.

"당장은 교수로서 다시 좋은 논문을 쓰고 싶다. 하지만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남성만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역할과 책임을 지는 자리에 도전해 보려고 한다. 여성들의 한계라고 여겨지는 영역을 더 넓히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기회가 된다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더 잘 해 보고 싶다."

-장관직 수행 중 연구자로 돌아가면 다시 하겠다고 생각했던 연구 주제가 있나.

"컴퓨터 기기 내 조화(Reconciliation)라고 하는, 여러 기기와 클라우드 상의 내 파일이 효율적으로 동기화하는 방법에 대해 이전부터 연구해 왔다. 내가 여기서 기기의 파일을 조금 수정해서 나머지 기기의 파일이 바뀌어야 하는데 클라우드에 전체 파일을 전송한다면 통신 대역폭을 낭비하게 되기 때문에, 수정된 부분만 전송해도 되는 알고리즘을 이용해 통신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논문의 아이디어를 신기술로 구현하려면 오랜 시간과 운이 필요하므로 눈에 보이는 성과로 연결될 논문을 쓰기가 쉽진 않다."

-인터뷰집 '공학하는 여자들'에서 고교 시절 진학을 위해 문과와 이과 선택을 놓고 고민한 적이 있다는 내용을 봤는데, 전공 선택 계기가 무엇인가.

"원래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고교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영어보다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이과를 선택했다. 대학 진학할 땐 취직에 유리하다, 여성도 공대에서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받아서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미사일, 로봇 등을 다루는 분야로 재미있겠다 싶어서 선택한 것이 공대 제어계측공학과였다. 미국 대학에선 세부 전공인 제어계측 등을 나누지 않고 있어 큰 주제를 포괄하는 전기컴퓨터공학부로 가서 박사과정을 밟은 것이다."

-경력 관련 선택의 갈림길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결정은 무엇인가. 문과를 갔다면 어떤 전공을 선택했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공학을 선택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과를 갔다면 법학과를 갔을 것 같다. 지금도 법학을 좋아한다. 법의 논리나 원리를 다투는 부분을 재미있게 느낀다. 다른 잘한 결정이라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학하러 가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것, 학위를 받기 전에 미국 산업체에서 한 번 일해본 것, 너무 늦지 않게 귀국을 결심한 것, 공직에 나가기로 하고 실제로 맡아 본 것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정년 개념은 65세 기준인데 제게 앞으로 6년밖에 안 남아 일할 수 있는 기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앞으로 결정이 내 마지막 경력이 될 수 있어 좋은 결정을 내리고 싶다."

-앞으로 삶에서 목표는.

"구체적으로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목표는 없지만, 우리나라 여성이 꿈을 꾸고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역할, 책임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해나가겠다."

-삶의 신조나 격언이 있다면.

"과거와 지금이 좀 다른데 예전에 오프라 윈프리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접하고 그가 말한 얘기에 공감한 적이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사람들에게 상냥했나, 친절했나 그리고 오늘 저녁에 내가 할 일을 다 했나 돌아본다는 것이었는데 그걸 가끔 떠올리며 살았다. 과거의 나는 어떤 조직에서 잘 화합하고 팀 플레이어로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게 중요했다. 최근 들어서는 앞으로 내 경력이 길지 않기 때문에 팀 플레이어보다 어떤 리더로서, 개척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떠올린다. 앞으로 이런 것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존경하거나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어머니와 큰오빠, 두 분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두 분 희생이 없었다면, 두 분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다."

-동료, 후배, 제자 여성과기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는지.

"공학하는 여자들, 과학하는 여자들, 그런 여성들이 성공하고 좌절하는 얘기를 다룬 글을 많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의의 한계', 이런 책도 권하고 싶다. 저자가 다루는 이 시대의 정의, 공정, 이런 개념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부합하고 공감된다."

-여성과기인으로서 고충을 경험했는지.

"박사과정에 학업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게 육아에 많은 시간을 쏟느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었다. 또 사회생활 할 때 조직 안에서 저는 항상 여성으로 소수자였다. 미국에선 여성 동료가 몇 명이라도 있었지만, 한국에선 너무 소수여서 여성이 발언권을 갖기 어려웠고 발언권이 생겨도 각자 살아온 경험이 남성들과 달라, 생각 차이도 매우 컸다. 그러다 보니 내 발언에 대한 지지를 얻는 게 어려웠고 조직 안에서 느끼는 외로움 같은 게 있었다. 여성과기인들은 지금도 조직에서 항상 소수이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느낄 것 같다. 조직에 여성 비율이 적어도 15~20% 이상 돼야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고 수용할 수 있고 그 이하는 어려운 것 같다."

-경력 단절 위기를 겪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 줬는지.

"가르친 대학원생 중 참 똑똑하고 훌륭한 학생인데 결혼, 출산, 육아하면서 결국 일을 그만두는 모습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이런 학생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 알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갈림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독박'을 쓰지 말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라고 얘기한다. 월급을 모두 가사도우미와 육아도우미에게 쓰더라도 경력을 지속하라고 한다. 이럴 때 배우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수입이 얼마나 되냐는 문제가 아니다. 아내가 경력을 개발해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느냐, 사회생활에서 성취를 느끼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배우자를 동등하게 '일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육아와 가사를 자기 일이라고 인식하는 문화로 바뀌었으면 한다."
 

임혜숙 교수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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