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채 KB손해보험 안산보상센터 센터장 [사진=이아현 기자]
[이코노믹데일리] "22년 배구 선수 경력은 제2의 보험 인생을 걸어가는 가장 큰 자양분입니다."
2m에 달하는 장신으로 회의실에 들어선 김성채 KB손해보험 안산보상센터장(50).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상대를 압도하는 체구와 달리 육성은 기대 이상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편안한 목소리와 제스처에서 16년 차 베테랑 보험 '보상맨'으로서 충분한 아우라가 풍겼다.
큰 키와 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그의 전직(前職)은 배구 선수다. 1990~2000년대 '오빠부대'를 이끌며 20년 넘게 코트를 누빈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띈다. 선수 생활을 접고 제2의 인생길로 보험업을 택한 LIG그레이터스(현 KB손보 스타즈) '부동의 레프트' 공격수 김성채, 현재는 KB손보 간판 보상맨으로 활약하는 김 센터장을 만나봤다.
◆코트 위 해결사, 이젠 보상 현장의 해결사
실업배구 전성기를 맞았던 20여 년 전 김 센터장은 LIG 배구단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레프트 포지션을 책임진 그는 장신과 높은 점프력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타격으로 팀에서 에이스를 꿰찼다. 시원한 스파이크가 주특기였던 그는 상대팀 경계 대상 1호로 '코트 위 해결사'로 불렸다.
수많은 팬을 이끌고 다닌 김 센터장은 수줍은 미소로 "중학교 1학년 때 지인의 제안으로 배구를 시작했고 1993년 럭키화재(LG화재 전신·LIG그레이터스)에 입단했다"며 "그 당시는 거의 체육관이 꽉 찼는데 인터넷이 많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이다 보니 팬레터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14살부터 36살까지 22년간 선수 생활을 한 그는 2006년 은퇴 결정 여부를 놓고 일생일대 기로에 서게 된다. 선수 나이로는 고령에 속하는 30대 중후반을 맞아 인생의 제2막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관한 고민이었다. 김 센터장은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고민이 참 많았는데 학창 시절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한 것도 아니고 평생 운동만 했기 때문"이라며 "대다수 선출(선수 출신)은 사실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게 지도자밖에 없다는 통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 그의 결론은 "(지도자로서) 자신은 없었다"였다. 그렇게 KB손보 성남보상센터에 새 둥지를 틀었다. 2005년 프로배구가 공식 출범하기 전 실업배구계는 선수도 회사,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등에 소속된 직원이라 은퇴 후 평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김 센터장은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KB손보 정직원으로 이력을 쌓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선출 직원들이 은퇴 후 진로를 놓고 방황하는 사례를 예방하기 위한 취지에서도 기존 소속을 그대로 이어가는 제도는 긍정적이었다. 그는 "같이 땀 흘리고 한솥밥을 먹던 친구들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혜택을 받은 것"이라며 "나이가 비슷한 선후배들 모두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결정을 놓고 주위 반응은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 김 센터장 주변 지인들은 "배구와 아예 다른 판인 보험업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걱정을 쏟아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며 안도감을 전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자신감이었다.
"사실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럼에도 한번 결심한 이상 해야지, 뭐 어떡하겠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편안했어요."
그렇게 첫발을 뗀 보험업 현장의 장벽은 예상보다 높았다. 센터로 발령받은 후 처음 배정된 업무가 교통사고 관련 경위를 파악하고 피해자를 만난 합의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는 표현이 먼저 나왔다.
김 센터장은 "약관이라든지 법령이라든지 당시 본인에게 생소한 단어니까 잘 몰랐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 처음에는 고생 좀 했다"며 "하지만 자동차 사고가 어떤 법률로 처리가 되고 약관은 어떻게 되는지 고객에게 안내해줘야 하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고 기억했다. 업무 중간에 짬을 내 관련 서적도 찾아보고 주경야독한 날도 상당수였다.
업무 초기에 여러 어려움이 닥쳤지만 주위 동료들은 김 센터장에게 늘 '파이팅'을 외쳤다. 마치 배구 코트 위 팀워크를 보듯 동료 직원들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됐다.
"주위에 동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운동하다 왔으니 법률 지식도 잘 모르고 습득도 느리다 보니까 주위에서 이해해주고 많이 배려해줬고 조언도 많이 해줬는데 기억이 생생합니다."
◆베테랑 보상맨의 영업 비밀 "끈질긴 승부력"
사람을 만나 사고 상황을 진단하고 보상 범위를 결정하는 보험업 특성상 업무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짓말로 입원해 보험금을 타내는 이른바 '나이롱환자'를 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김 센터장은 "교통사고 피해자 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다"며 "사고가 나면 보통 나이롱환자도 많이 발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기고 보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보험업계에서 기피하는 이런 가짜 환자를 상대하는 것이 김 센터장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으로 일관하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쌓여가는 스트레스가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김 센터장이 터득한 해결법은 단 하나, 직접 부딪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람 상대하는 비법(노하우)이 따로 있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명료했다. 그는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 운동만 하다 직을 바꿔 현업에서 근무하는 선출들의 최대 장점은 승부력"이라며 "지기 싫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집념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뭐든지 끝장을 본다는 각오로 해결하기 위해 한 발 더 뛰고, 한 번 더 통화하고, 또 한 번 만나고 끈질기게 승부를 봤다"며 "무승부 없이 이기느냐 지느냐로 가리는 코트 위처럼 업무를 볼 때도 같은 정신으로 임했다"고 전했다.
경기에서 늘 승리할 수 없듯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중간에 발생하는 고비는 불가피했다. 선수 시절 경기를 뛸 때는 집중할 수 있도록 코칭 스태프들이 지원을 해줬지만 보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보상맨 생활 6~7년 차 됐을 시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감정까지 피폐하고 말그대로 번아웃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급기야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선수들이 슬럼프를 겪듯 보상맨 김성채에게도 위기가 닥친 셈이다. 이때 역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카드는 동료뿐이었다. 직장 선후배들과 지속적인 대화로 해결책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돈독해진 끈끈한 동료애는 다른 회사와 비교 불가였다.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보험 들어서 참 다행이네'라는 고객들 감사의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보람된다"고 언급한 김 센터장은 현장에서 그를 알아보는 고객들도 여럿 있었다고 전했다. 업무 초반에는 많은 고객이 "김성채 맞지요? 선수 맞지요?" 하며 재차 묻고는 했다.
에피소드로 김 센터장의 열렬한 팬으로서 일부러 합의를 안 해주는 짓궂은 고객을 떠올렸다. 그는 "면담을 충분히 했으면 마무리하고 집에 갈 법한데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한 사례도 있었다"며 "배구팬으로, 또 선수 김성채를 기억해주는 고마운 분들이라 지금도 기억이 많이 난다"고 말했다.
◆체육지도자 아닌 보험업 선배로 "후배 양성"
KB손보 경기도 안산과 시흥 지역 보상 업무를 총괄하는 김 센터장을 향한 사내 평판은 선수 시절보다 뜨겁다. 사측 관계자는 "운동할 때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해서 고생도 많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성실히 근무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며 "다른 직원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배구 선수 후배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이 따랐다. 김 센터장은 "지금 배구하는 후배들은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며 "뛰어난 몇몇 선수를 제외한 대부분 선수는 많은 연봉을 못 받으면서 선수 생명도 30대 초중반이면 끝나고, 은퇴 후에는 더욱이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향후 계획과 포부에 관해 김 센터장 키워드는 역시 '후배'였다. 선출 후배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한 그는 더 많은 후배가 현업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적어도 제가 센터장으로 있는 동안은 딱 하나 바람, 후배 양성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롯이 후배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2m에 달하는 장신으로 회의실에 들어선 김성채 KB손해보험 안산보상센터장(50).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상대를 압도하는 체구와 달리 육성은 기대 이상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편안한 목소리와 제스처에서 16년 차 베테랑 보험 '보상맨'으로서 충분한 아우라가 풍겼다.
큰 키와 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그의 전직(前職)은 배구 선수다. 1990~2000년대 '오빠부대'를 이끌며 20년 넘게 코트를 누빈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띈다. 선수 생활을 접고 제2의 인생길로 보험업을 택한 LIG그레이터스(현 KB손보 스타즈) '부동의 레프트' 공격수 김성채, 현재는 KB손보 간판 보상맨으로 활약하는 김 센터장을 만나봤다.
◆코트 위 해결사, 이젠 보상 현장의 해결사
실업배구 전성기를 맞았던 20여 년 전 김 센터장은 LIG 배구단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레프트 포지션을 책임진 그는 장신과 높은 점프력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타격으로 팀에서 에이스를 꿰찼다. 시원한 스파이크가 주특기였던 그는 상대팀 경계 대상 1호로 '코트 위 해결사'로 불렸다.
수많은 팬을 이끌고 다닌 김 센터장은 수줍은 미소로 "중학교 1학년 때 지인의 제안으로 배구를 시작했고 1993년 럭키화재(LG화재 전신·LIG그레이터스)에 입단했다"며 "그 당시는 거의 체육관이 꽉 찼는데 인터넷이 많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이다 보니 팬레터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14살부터 36살까지 22년간 선수 생활을 한 그는 2006년 은퇴 결정 여부를 놓고 일생일대 기로에 서게 된다. 선수 나이로는 고령에 속하는 30대 중후반을 맞아 인생의 제2막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관한 고민이었다. 김 센터장은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고민이 참 많았는데 학창 시절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한 것도 아니고 평생 운동만 했기 때문"이라며 "대다수 선출(선수 출신)은 사실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게 지도자밖에 없다는 통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 그의 결론은 "(지도자로서) 자신은 없었다"였다. 그렇게 KB손보 성남보상센터에 새 둥지를 틀었다. 2005년 프로배구가 공식 출범하기 전 실업배구계는 선수도 회사,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등에 소속된 직원이라 은퇴 후 평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김 센터장은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KB손보 정직원으로 이력을 쌓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선출 직원들이 은퇴 후 진로를 놓고 방황하는 사례를 예방하기 위한 취지에서도 기존 소속을 그대로 이어가는 제도는 긍정적이었다. 그는 "같이 땀 흘리고 한솥밥을 먹던 친구들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혜택을 받은 것"이라며 "나이가 비슷한 선후배들 모두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결정을 놓고 주위 반응은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 김 센터장 주변 지인들은 "배구와 아예 다른 판인 보험업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걱정을 쏟아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며 안도감을 전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자신감이었다.
"사실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럼에도 한번 결심한 이상 해야지, 뭐 어떡하겠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편안했어요."
그렇게 첫발을 뗀 보험업 현장의 장벽은 예상보다 높았다. 센터로 발령받은 후 처음 배정된 업무가 교통사고 관련 경위를 파악하고 피해자를 만난 합의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는 표현이 먼저 나왔다.
김 센터장은 "약관이라든지 법령이라든지 당시 본인에게 생소한 단어니까 잘 몰랐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 처음에는 고생 좀 했다"며 "하지만 자동차 사고가 어떤 법률로 처리가 되고 약관은 어떻게 되는지 고객에게 안내해줘야 하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고 기억했다. 업무 중간에 짬을 내 관련 서적도 찾아보고 주경야독한 날도 상당수였다.
업무 초기에 여러 어려움이 닥쳤지만 주위 동료들은 김 센터장에게 늘 '파이팅'을 외쳤다. 마치 배구 코트 위 팀워크를 보듯 동료 직원들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됐다.
"주위에 동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운동하다 왔으니 법률 지식도 잘 모르고 습득도 느리다 보니까 주위에서 이해해주고 많이 배려해줬고 조언도 많이 해줬는데 기억이 생생합니다."
◆베테랑 보상맨의 영업 비밀 "끈질긴 승부력"
사람을 만나 사고 상황을 진단하고 보상 범위를 결정하는 보험업 특성상 업무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짓말로 입원해 보험금을 타내는 이른바 '나이롱환자'를 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김 센터장은 "교통사고 피해자 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다"며 "사고가 나면 보통 나이롱환자도 많이 발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기고 보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보험업계에서 기피하는 이런 가짜 환자를 상대하는 것이 김 센터장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으로 일관하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쌓여가는 스트레스가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김 센터장이 터득한 해결법은 단 하나, 직접 부딪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람 상대하는 비법(노하우)이 따로 있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명료했다. 그는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 운동만 하다 직을 바꿔 현업에서 근무하는 선출들의 최대 장점은 승부력"이라며 "지기 싫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집념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뭐든지 끝장을 본다는 각오로 해결하기 위해 한 발 더 뛰고, 한 번 더 통화하고, 또 한 번 만나고 끈질기게 승부를 봤다"며 "무승부 없이 이기느냐 지느냐로 가리는 코트 위처럼 업무를 볼 때도 같은 정신으로 임했다"고 전했다.
경기에서 늘 승리할 수 없듯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중간에 발생하는 고비는 불가피했다. 선수 시절 경기를 뛸 때는 집중할 수 있도록 코칭 스태프들이 지원을 해줬지만 보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보상맨 생활 6~7년 차 됐을 시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감정까지 피폐하고 말그대로 번아웃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급기야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선수들이 슬럼프를 겪듯 보상맨 김성채에게도 위기가 닥친 셈이다. 이때 역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카드는 동료뿐이었다. 직장 선후배들과 지속적인 대화로 해결책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돈독해진 끈끈한 동료애는 다른 회사와 비교 불가였다.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보험 들어서 참 다행이네'라는 고객들 감사의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보람된다"고 언급한 김 센터장은 현장에서 그를 알아보는 고객들도 여럿 있었다고 전했다. 업무 초반에는 많은 고객이 "김성채 맞지요? 선수 맞지요?" 하며 재차 묻고는 했다.
에피소드로 김 센터장의 열렬한 팬으로서 일부러 합의를 안 해주는 짓궂은 고객을 떠올렸다. 그는 "면담을 충분히 했으면 마무리하고 집에 갈 법한데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한 사례도 있었다"며 "배구팬으로, 또 선수 김성채를 기억해주는 고마운 분들이라 지금도 기억이 많이 난다"고 말했다.
◆체육지도자 아닌 보험업 선배로 "후배 양성"
KB손보 경기도 안산과 시흥 지역 보상 업무를 총괄하는 김 센터장을 향한 사내 평판은 선수 시절보다 뜨겁다. 사측 관계자는 "운동할 때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해서 고생도 많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성실히 근무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며 "다른 직원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배구 선수 후배들에게도 진심 어린 조언이 따랐다. 김 센터장은 "지금 배구하는 후배들은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며 "뛰어난 몇몇 선수를 제외한 대부분 선수는 많은 연봉을 못 받으면서 선수 생명도 30대 초중반이면 끝나고, 은퇴 후에는 더욱이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향후 계획과 포부에 관해 김 센터장 키워드는 역시 '후배'였다. 선출 후배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한 그는 더 많은 후배가 현업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적어도 제가 센터장으로 있는 동안은 딱 하나 바람, 후배 양성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롯이 후배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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