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의 100℃] '흙바닥 그린' 골프장, '대여료 0원' 골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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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입력 2022-05-0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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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죄송합니다. 저희 그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최근 라운드를 다녀온 A 골프장 담당 캐디의 첫인사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뒤로한 채 1번 홀로 향했다. 티샷과 두 번째 샷으로 도착한 그린은 더 이상 그린이라 부를 수 없었다. 흙바닥인 관계로 샌드라 부름 직하다. 누가 벙커에 깃대를 꽂아놨다. 캐디에게 그린 스피드를 물었다.

대답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2.1인데 그것보다 더 안 나오기도 해요"라며 쩔쩔맸다. 스팀프미터(그린 속도 측정기)로 굴린 공이 같은 거리를 낼 리 만무했다. 퍼터로 공을 굴리면 굵은 모래에 사방으로 튀었다.

동반자들도 "오늘은 그냥 즐겨야겠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18홀 라운드 종료 후 그린 키퍼를 찾았다. "상태가 이렇게 심한데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찼다. "봄 성수기라 예약이 많아서 보수할 시간이 적다."

사실 보수는 진즉에 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대호황을 맞아 보수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동장군에도 그린을 쉬지 못하게 한 벌이다. 죽어가는 그린에 기워입은 옷 혹은 퍼즐 조각처럼 색과 결이 다른 잔디를 붙이거나 흙을 잔뜩 뿌려댔다.

이는 비단 이 골프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전국 500여개 골프장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상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겠다는 심산이 만들어낸 폐해다. 골프장이 본연의 모습과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말과 글로만 명품 코스다. 샌드에, 결이 다른 잔디 조각에 꽂은 깃대는 명품이 아닌 구제다. 명예는 뒤로한 채 돈독만 올랐다.

이러한 연유로 최근 몇 년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를 대표하는 선수권대회는 구명정을 타고 표류했다. 44년의 역사를 보유한 메이저 대회지만, 대회장을 구하지 못했다. 장사하기 바쁜 골프장들은 대회 기간에 벌지 못하는 돈을 계산기로 두들겼다. 한 골프장은 "잔디가 상하고, 영업 못하는 기간이 있어서 힘들다"며 거절했고, 다른 골프장은 영업 이익을 뛰어넘는 수억원을 불렀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대회에 값어치를 매기는 황당한 순간이다. 해외의 경우 '챔피언십 코스'라는 타이틀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미국골프협회(USGA)와 영국왕립골프협회(R&A)는 소속 골프대회를 가깝게는 몇 년, 멀게는 수십년 뒤의 대회장을 발표한다. 모두 세계 100대 안에서 손꼽히는 골프장이다.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그저 "감사하다"고 할 뿐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일동레이크 골프클럽이 구명정으로 다가갔다. 큰 뱃고동 소리를 내면서다. 회원들을 설득했다. KLPGA 선수권대회를 치르기 위해서다. 회원들은 선뜻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계산기를 두들겼느냐. 아니다. 1주일 동안 대회를 치르는 비용은 '0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프로암 상품을 '농심' 제품으로 가득 채웠다.

대회 중 코스 상태는 그 어느 골프장보다도 신선하고 푸르렀다. 메이저에 어울리는 챔피언십 코스였다. 우승자는 변별력 판별 홀(4, 16번 홀)에서 갈렸다. 마지막 날 두 홀에서 버디를 잡은 김아림(27)이 우승했다. 명품 코스에서 품에 안은 메이저 우승컵이다.
 

일동레이크 골프클럽 18번 홀 그린 위에 메이저 우승컵을 올려놓은 김아림. [사진=KLPGA·박준석]

정철수 일동레이크 골프클럽 대표이사는 "선수권대회는 우리나라 여자 골프의 역사다. 성료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오너(소유주)의 의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내 골프장 프런트에는 유독 '10대 골프장'이라는 상패와 현수막이 즐비하다. 한 선정 기관에서는 10대고, 다른 기관에서 10대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한다. '10대 골프장'이라고 해도 실제 라운드를 해보면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일동레이크 골프클럽은 이제 '10대 골프장'을 뛰어넘는 '챔피언십 코스'로 이름을 남겼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명예다.

맛집을 찾아 팔도를 유랑하는 미식가는 새로운 인테리어에 어색한 신메뉴가 가득한 곳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떨어져 나간 허름한 간판에 주름 가득한 할머니가 반겨주는 곳, 굽은 허리로 힘겹게 내어준 진득한 국밥 한 그릇에 감탄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골퍼도 미식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제 골프장들도 명예를 생각할 때가 됐다. 카트를 타고 나가서 흙바닥 그린을 보라. 우리가 알던 골프는 어디에, 명예는 어디에 있나.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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