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만난 연못과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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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2-04-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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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서울 종로 인사동 골목 끝자락엔 전형적인 19세기 양식의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이 잘 어우러진 건물인 천도교본부교당이 자리하고 있다. 삼일운동백주년(2019년) 사업을 함께 했을 때 본당 안에 들어가 의례에 참석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벚꽃이 만개한 주말을 이용하여 경주가는 길에 용담정(龍潭亭)까지 찾았다. 초대교주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선생께서 득도(得道 깨달음을 얻음)한 민족의 성지인 까닭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점인 삼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은 천도교이며 그 뿌리는 동학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의 모든 구성원은 선생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순례공덕으로 일행 4명에게 부과된 1/n의 빚은 얼마간 갚아질래나. 용담정 가는 길은 고요했고 오솔길에는 우리 뿐이다. 북향에 음지인지라 군데군데 진달래만 간간히 피어있다. 용담교 건너 언덕 위에 용담정이 보인다.

 

[경주 용담정 전경]



경주는 천년왕도로 당시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수운선생에게 그 시절 용담은 경주의 중심이었다. 선생이 창작한 한글가사집 제목도《용담유사》였다. 여덟편의 가사 가운데 첫작품이〈용담가〉였다. 깨달음을 얻은 그 해(1860년)에 지었는데 특히 구미산과 용담에 대한 반복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구미산 산수 좋은 경승지... 구미산 산수 좋은 풍경...(중략)
이내 선경 구미 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 이런 산수 우리나라에 또 있을소나 ”
경치도 경치지만 ‘천사문답(天師問答 조선의 하느님과 묻고 답함)’을 나누었던 자신의 구원처인 까닭이다.
 
용담정을 포함한 구미산 자락과 인근마을은 최씨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였다. 본래 용담정은 암자 터(圓寂庵으로 전한다)였다. 수운의 할아버지 최종하(崔宗夏)옹이 매입하여 와룡암(臥龍巖庵)으로 명명한 뒤 서당으로 운영했다. 이후 골짜기는 ‘용(龍)’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수운의 아버지 최옥(崔鋈)어른은 기존의 와룡암(臥龍庵)을 다시 손을 본 뒤 용담서사(龍潭書社)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사후에 용담서사 역시 퇴락했다. 수운이 1859년 고행을 마치고 36살 때 고향에 돌아와 용담서사를 복원하고서 용담정이라고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용담정은 순도(殉道 순교)이후 폐허화되었다가 1914년 뜻있는 후학에 의해 복원되었고 1960년 낡은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1975년 천도교단에서 현재의 용담정을 준공했다. 다섯 칸으로 된 정식 전통한옥 건물이지만 여전히 정자(亭子)라고 부른다.
 
당신은 스스로 호를 수운(水雲)이라고 지었다. 용담에 흐르는 물과 구미산에 서린 구름을 상징했다. 구미산에 걸린 구름이 비가 되어 용담의 물이 되었다가 다시 온 세상을 적시기를 염원했다. 그래서 제선(濟宣)이란 본래이름도 35세 때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우(濟愚)로 바꾼 것이다. 2대교주 최시형에게 전한 전법게(傳法偈 후계자로 인정한 증표)도 “용담수류사해원(龍潭水流四海元 용담의 물은 흘러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으로 시작된다. 당신의 가르침이 널리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오늘도 계곡물은 변함없이 넓은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흘러간다.
 
건너편 멀지않는 곳에 자리잡은 생가에 들렀다. 수운고택(水雲古宅)이다. 선생은 경주남산 서북쪽 구미산(龜尾山거북꼬리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3일을 울고 상서러운 기운이 집을 둘렀다.”고 했다. 하지만 20세 무렵 화재로 소실된 뒤 빈터로 남아있다가 1971년 집터에 유허지 비석을 세웠고 2014년 생가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새집이 주는 생경함이 없어지려면 세월이 좀 필요하다. 생명있는 집으로 바뀌려면 방문객의 발자국과 손 때가 켜켜히 쌓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한다. 생가가 있으면 유택도 있기 마련이다. 태묘 역시 가깝다.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길은 좁고 경사가 가팔랐다. 한참 올라가니 하늘이 열리면서 툭 트인 평지가 나타난다. 양지바른 잔디마당에는 군데군데 할미꽃이 피어있다.
 
태묘 왼편의 1미터 남짓한 석상이 특이하다. 여느 묘소에서 볼 수 있는 짝수의 문인·무인상이 무덤 앞에 시립하여 마주보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정면북향을 향해 혼자 우뚝 서 있다. ‘시천교조제세주(侍天敎祖濟世主 시천교의 교조이며 세상을 구제하는 조선의 주님. 시천교는 천도교의 일파)’라는 몸체에 새겨진 글씨로 미루어보건데 교조 최수운의 인물상이리라. 두건을 쓴 비장한 표정으로 왼손에는 서책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단주를 쥐고 있다. 1911년도 5월에 조성했으니 백년도 훨씬 넘었다. 그 세월만큼 더깨가 끼어있다. 근대 인물조각상의 효시로 봐도 무방하며 서울에서 제작한 뒤 기차를 이용해 경주로 싣고 왔다고 한다.
 
 

[수운 최재우 선생 태묘 석상]
 

[수운 최재우 선생 태묘 석상]


태묘의 ‘태(太)’자는 ‘공자태묘’ 처럼 성인급 무덤에 붙는 존칭이다. 대구 관덕정 부근에서 극형을 받은 뒤 제자와 가족이 수습하여 구미산 끝자락 대릿골 밭머리에 44년간 암장했다. 평평한 무덤으로 아는 사람만 알고서 주변에는 쉬쉬했다. 1907년 지금 자리로 이장하여 겨우 봉분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2013년 대대적인 성역화의 결과이다. 교조석상 만큼의 시간이 입혀지면 묘역도 명실상부한 태묘의 위용을 갖추리라.
 
쉴 공간을 찾았다. 허기도 달래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찻집에 앉았는데 문득 ‘용담’이 화두가 된다.
용담(龍潭)선사를 찾아온 덕산(德山)선사가 던진 도발적인 첫마디는 이랬다.
“용담에 왔는데 연못도 보이지 않고 용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 당나라 용담이 아니라 경주 용담을 다녀왔는데 연못과 용을 제대로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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