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영의 재팬 플래시] '윤석열-기시다 선언' 지금부터 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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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前뉴시스 도쿄특파원·日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
입력 2022-03-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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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전 뉴시스 도쿄특파원·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



윤석열 정부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외교 분야에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한·일 관계는 참으로 다루기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가 될 것이다. 한·일 관계는 말 그대로 지뢰밭이다. 양국 간에 과거사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역대 정부에서 이 지뢰가 한두 번 폭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는 ‘위안부 합의’ 무력화와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부터 시작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ISOMIA·지소미아) 존속 문제,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일본 초계기 위협 비행 논란, 한국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그야말로 잠시도 쉬지 않고 양국 간에는 연속으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 간 불신과 충돌의 시대는 정리될 것인가. 윤석열 당선인이 대선 기간 중 행한 발언이나 공약, 대선 이후 언급 등을 살펴보면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는 충만해 보인다. 윤 당선인은 대선 공약집에서 “한·일 관계가 과거사 이슈에 매몰된 채 현안 해결을 위한 정책적 노력 없이 악화 일로를 지속했다”고 밝혔고, 대국민 당선 인사에서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 의지를 천명했다.

일본 측도 분위기는 괜찮아 보인다. 한국 대선 기간을 전후해 일본 정가와 정부, 언론 등 분위기는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선 기간 일본에서는 조심스럽지만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무엇보다 윤 후보가 유세 기간 한·일 관계를 바로잡겠다는 일반론을 넘어 문재인 정부의 대일 정책이 잘못되었고 이것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인 것이 어필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대일 정책이 그동안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나마 한 걸음씩 진전해 온 한·일 관계를 일격에 무너뜨려 버렸다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이런 인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본 내 한국 전문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무리 지한파 또는 친한파라도 “이번에는 한국이 심했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다. 그러니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일 관계 현장을 뛰는 일본의 한 전문가는 구체적으로 이런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에 불만이 컸다. 문 대통령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되풀이하면서 사실상 행정부 수반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이 말 뒤에 숨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법원이 그런 판결을 내릴 수는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강조해버리면 피해자 한 명이라도 반대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된다. 행정부 수반이자 외교 수장으로서 스스로 선택지를 줄여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일본에서는 윤 당선인 입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나오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지 않자 윤 당선인은 최소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 뒤에 숨지는 않겠구나 하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됐다.”

윤 당선인이 북한의 위협에 단호한 대응을 강조하면서 한·미·일 공조를 중시하는 대목도 일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해 일본은 국민 정서로는 한국보다 더 위기를 느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의 끊임없는 위협에 둔감해졌는지도 모른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북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 위를 지나가면 전국순간경보시스템(J얼럿)이라는 재난 및 긴급 상황을 알리는 경보가 울린다.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미·일 공조와 정보 교환이 일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긴요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중국·러시아·북한 간 연대 가능성이 제기되는 동북아의 새로운 대결 체제에서 한·미·일 공조는 더욱 절박한 과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순항을 성급히 장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현재 한국 내 반일(反日) 감정과 일본 내 혐한(嫌韓) 감정의 강도를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일본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한국이 과거사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는 자세를 선뜻 누그러뜨리지 않을 분위기다. 일본이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첫 시금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 문제로 보인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지난 12일자 사설에서 “윤 당선인은 우선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한국) 신정권 측 생각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사히는 일본 정부에도 “한국의 정권 교체를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이는 일반론에 불과하고 한국에 대한 요구는 구체적이다.

한국 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자산 매각 신청에 대해 특별현금화명령(매각명령)을 내렸지만 현재는 일본제철 측 항고와 관련 서류 송달 지연 등으로 매각이 미뤄지고 있다. 대법원에서도 매각명령을 최종 인용하면 일본제철이 포스코와 합작해 세운 회사(PNR)의 주식 매각을 통해 현금화 절차가 진행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상응한 대항 조치를 취하겠다고 이전부터 경고하고 있어 당장의 시한폭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 곧이어 6월에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일본도 7월에 참의원 선거가 있다. 양국 정부 모두 정권 안정에 필수적인 선거를 치르면서 국내 반일 감정이나 혐한 감정을 뚫고 과감히 정책 전환을 시도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더구나 한국은 반일을 기치로 내세우는 야당이 압도적 국회 의석을 장악하고 있어 새 정부가 얼마나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시다 일본 정부는 아베 정권에 비하면 강경 보수적 기조가 비교적 덜하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자신이 전통적으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자민당 내 파벌 ‘고치카이(宏池會)’ 소속이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견제와 일본 내 혐한 분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기시다 내각은 최근 일본 사도(佐渡)광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에서 아베 전 총리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 한·일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다층적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이걸 하나하나 신중하게 풀어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다. 시간이 걸린다고 풀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수록 말 그대로 쾌도난마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관계에 역사적 전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도 한·일 관계가 뒤엉켜 있을 때 나온 것이다. 전임 김영삼 대통령의 대일 강경 발언과 IMF 외환위기 때 일본의 냉랭한 태도 등으로 한·일 간에 감정적 대립이 고조돼 있을 때였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제를 놓고 한국 내 반대 여론도 거셌다. 여론을 살피며 이것저것 따졌더라면 불가능했을 선언이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양국 관계의 과거와 미래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지도자의 지혜와 결단이었을 것이다.

윤 당선인도 한·일 관계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 회복을 추구할 뜻을 밝혔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치밀한 준비를 해서 취임 후 첫 한·일 정상회담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뛰어넘는 ‘윤석열·기시다 선언’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여기에 양국 관계의 현안 해결책을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1998년 채택 후 24년이 지나도록 왜 이 선언의 정신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성찰 위에 앞으로 양국 관계가 나아갈 기본 방향과 원칙을 선언하는 것으로도 역사적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한·일 양국 모두 ‘미래’를 강조하고 있는 만큼 그 미래를 책임지게 될 미래 세대 목소리가 충분히 담겨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유념해야 한다. 일본 내각이 지난해 실시한 외교에 관한 여론 조사를 살펴보면 일본 젊은 층은 기성세대에 비해 한국에 대한 감정이 훨씬 우호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을 한·일 관계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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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오부치 선언은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을 하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오부치 총리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고, 김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 지원 등 전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양국 국민, 특히 젊은 세대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한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동선언에는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11개 항목의 핵심 내용과 43개 항목의 행동계획이 포함됐으며, 정기적인 셔틀 외교, 대북 정책 공조, 문화·인적 교류 확충 등을 담고 있다. 이후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에 개방됐으나 오히려 ‘겨울연가’ 열풍 등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 선언으로 한·일 관계는 한때 최고의 시기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과거사 문제로 인해 다시 퇴행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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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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