⑲연동사를 명품 절로 살려낸 원행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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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2-01-3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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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의 곡차를 훔쳐먹는 살쾡이
《세종실록 지리지》 담양도호부 편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담양 연동사가 등장한다. 고려 문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금성(金城) 산성으로 오르는 중턱에 있는 연동사(煙洞寺)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절의 중이 술을 담가서 거의 익을 때쯤 되면 누가 감쪽같이 훔쳐 마셨다. 중이 이영간을 의심하여 두세 번 종아리를 때렸다. 이영간이 몰래 엿보니 늙은 살쾡이가 와서 훔쳐 마셨다. 이영간이 잡아서 죽이려 하자 살쾡이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네가 만일 나를 놓아주면 평생 유용하게 쓰일 신기한 술법(術法) 책을 주겠다" 하였다. 때마침 청의 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한 권의 책을 던져주므로 이영간이 그 살쾡이를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그 책을 간직하여 두었는데 나중에 장성하여 벼슬을 하매 이영간이 하는 모든 일이 보통과 달랐다.
 

연동사 일주문을 통해 극락보전이 보인다. [사진=황호택]

청의동자가 던져준 책은 비결서(祕訣書)였던 모양이다.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이 개성 박연폭포에 거동했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이영간이 칙서를 못에 던져 용을 혼내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기록으로 봐서 연동사는 고려시대 11세기 이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절이다. 연동사에서 동굴법당을 지나 경사가 가파른 길을 계속 올라가면 금성산성 보국문(輔國門)이 나온다.
금성산성에서 의병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유재란(1597) 이후 400년 동안 연동사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산죽(山竹)과 잡초가 무성하던 절터에 1990년대 초에 20대 후반의 젊은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터 위쪽의 동굴(지금의 동굴법당)에서 생식을 하면서 수도를 시작했다. ‘금성산성 화산암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연동사 절터에는 동굴이 여러 개 있다. 밑이 움푹 파인 거대한 암벽 앞 평평한 곳에 지장보살이 반쯤 묻혀 있었다. 노천법당 주변에도 무너진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는 동굴 수도를 하면서 연동사 복원을 평생 과업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오층석탑과 지장보살상이 서있는 연동사 노천법당. [사진=황호택]

지장보살을 땅에서 파내 바로 세웠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3층 석탑의 부재를 모았다. 담양군의 지원을 받아 없어진 부재는 새로 깎아 끼웠다. 1996년 완전히 복구한 연동사 3층 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0호)은 담양읍 5층석탑(보물 제506호), 곡성 가곡리 5층석탑(보물 제1322호)의  백제계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후기의 작품.
지장보살은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 모두가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다. 고려시대 후기에 지옥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 신앙이 유행했다. 이 석불도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젊은 스님은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화암마을이 고향이었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출가(出家) 전에 수원에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다. 담양 용화사의 수진 스님은 가정을 떠나 출가하겠다며 찾아온 이 젊은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을 원행(圓行‧1964~2014)이라고 지어주었다. 용화사 수진 스님한테 수계(受戒)한 승려들은 ‘행(行)’ 자를 돌림으로 쓴다.
수진 스님은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지장보살상이 남아 있고 경관이 좋은 연동사를 살려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쑥대밭 같은 폐사터에 젊은 스님 몇 명을 들여보냈지만 중도에 모두 포기하고 나왔다. 그는 원행에게 “금성산성 밑에 폐사터가 있는데 오래된 석불상도 있다. 백일기도를 하고 절을 개척해 보려는가” 라고 물었다. 원행이 선선히 수진 스님의 말을 따랐다.
원행은 조선시대의 도사로 알려진 전우치(田禹治)가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굴을 조금 더 파내고 그 속에서 수도를 했다. 잡초가 많은 절터의 여름은 모기가 많고, 산 속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젊은 스님은 주변의 지형을 최대한 살려 절을 가꾸었다. 폐허만 남은 절터에 극락보전 노천법당 동굴법당을 만들고 아름다운 정원처럼 가꾸었다. 암반 위에 고려시대의 돌 부처와 석탑을 모셔 놓고 법회를 하는 명물 노천법당이 한 스님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이 초기에 설법을 했던 곳도 법당이 아니라 노천이었다.

극락보전은 부처 뒤에 유리를 끼워 자연 채광을 한다. [사진=황호택]

金城山煙洞寺(금성산 연동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과 극락보전, 노천법당은 일직선상에 있다. 극락보전 불상 뒤로는 대형 통유리를 설치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한 창이다. 이 유리를 통해 300m 뒤 노천법당에서 부처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극락보전에서도 삼층석탑이 보인다. 연동사에는 지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태양열 발전을 해 전기가  늘 모자란다.
원행 스님은 찰진 논흙을 가져다가 516명의 나한상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아라한은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이라고 한다. 16 나한은 부처의 경지에 오른 제자들이고, 500 나한은 역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를 지칭한다. 원행은 나한상을 250 점가량 만들어놓았는데 똑같이 생긴 나한이 한 점도 없다. 그러나 나한상만 만들고 미처 굽지 않은 상태에서 원행이 젊은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떴다.

원행이 논흙을 가져다 빚은 215 나한상. [사진=황호택]

원행은 달마도를 기막히게 쳤다. 추성고을(주류회사) 양대수 대표는 원행이 달마도 치는 모습을 몇 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붓을 몇 번 휘두르면 그림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연동사 극락보전에 그의 달마도 작품이 두 점 걸려 있다. 원행은 달마도를 선물로 주기를 좋아했다. 그의 달마도는 연동사 신자라면 죄다 한 점씩 갖고 있을 정도.
극락보전 외벽에는 그가 그린 6점의 탱화가 남아 있다. 그중 한 점은 생전의 그의 모습을 닮아 자화상(自畵像) 같다. 극락보전 뒷벽의 탱화는 시작만 해놓고 중단했다. .
양 대표는 “원행이 천수경을 독경(讀經)하는 소리는 먼 곳까지 낭랑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장중하고 개성이 강해 신도들은 멀리서 듣고도 '원행이 독경을 하고 있구만'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한문 독경을 하고 나중에는 우리말 독경을 했다. 연동사 신도회장을 했던 고부정 씨(57)는 원행의 천수경 독경 CD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고 씨는 원행의 그림과 글씨도 수작(秀作)을 여러 점 갖고 있었다.

극락보전 외벽에 원행이 그린 탱화. 원행의 모습을 닮아 자화상 같다. [사진=황호택]

“나와 원행스님은 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중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경상도에서도 연동사를 많이 찾아왔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는 절터에 난 잡초를 깎는 것이 원행의 일과였다. 풀을 깎다가 툭 쏘는 기분이 들어 말벌에 쏘인 것으로 알았는데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 가니 쓰쓰가무시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진드기의 유충이 피부에 붙어 피를 빨아먹어 궤양이 생기는 질병이다. 원행은 그렇게 쉰의 나이에 부처님 곁으로 갔다.
“잡초가 며칠만 놔두어도 무성해졌어요. 원행 스님은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쉬지 않고 풀을 깎으셨죠.” 스님을 따르던 보살의 이야기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는 맞은편 산비탈에는 키가 크고 몸피가 가장 굵은 맹종죽 숲이 길게 뻗어 있다. 담양군이 조성한 대숲이다.

연동사 극락보전. 경관이 뛰어나고 조경도 잘돼 있다. [사진=황호택]

해우소도 원행이 직접 지었다. 자연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승려의 미적 감각이 반영돼 있다. 통나무 자갈 기와로 벽을 만들어 벽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장실 내부가 깨끗했고 맹종죽 숲의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왔다.
쉼터찻집에서는 절 부근에서 나는 야생차와 차밭에서 가꾼 차를 섞어 내방객과 신도들에게 대접한다. 찻집에는 원행스님이 제작한 나한상들이 전시돼 있다.
요사채의 지붕은 대나무와 산죽을 엮어 얹었다. 방바닥과 벽은 황토를 발랐다. 자연친화적 인테리어다.
원행이 급작스레 열반하고 나서 출가 전 사가(私家)의 동생인 선행(宣行) 스님이 와서 절을 맡고 있다. 절집에서 사가의 형제가 주지를 물려받고 ‘행’자 돌림 법명을 쓰는 것도 드문 일이다. 선행은 “큰스님이 형제간이니 법명에 항렬(돌림자)로 행(行)자를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원행이 주지일 때는 연동사의 소속 종단이 용화사와 같은 태고종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종단으로 바뀌었다. 절 사정은 캐묻지 않았다.

극락보전에 걸려 있는 원행의 달마도. [사진=황호택]

노천법당으로 오르는 비탈에는 사람 키와 비슷한 오죽(烏竹) 숲이 있다. 오죽은 줄기가 검어서 조경용으로 식재한다. 원행 스님이 오죽 근경(根莖)을 구해다 심으면서 검은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었다. 동굴법당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조릿대가 자란다.
연동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많아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첫째 설이다. 금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연동사가 완전히 전소되고 주변 계곡을 시신이 뒤덮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족들이 찾아와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향을 피웠는데 그 향이 골짜기에 가득 차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두 번째 설이다. 고려시대부터 연동사로 불렸기 때문에 두 번째 설은 시제(時制)가 어긋난다. 연동사 옆 골자끼의 이름은 ‘이천골’. 정유재란 때 시신 2천구가 뒹굴어 이천골(骨)이라 불렸다고 한다.
연동사에서 세워놓은 동굴법당 안내판에는 전우치가 연동사에 업둥이로 들어와서 동굴법당에서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를 훔쳐먹던 여우를 잡아 용서해주고 살려 보내니 여우가 전우치에게 도술을 가르쳐주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는 ‘전우치는 실존 인물이며 담양 전씨라고 한다’는 문구가 씌어있다. 제세팔선주는 마시면 신선이 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연동사에서 스님들의 건강을 위해 빚어 마시던 곡차가 추성주로 비법이 내려온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연동사의 동굴법당.[사진=황호택]

절 아래로는 저수지가 있고 그 밑으로 산림청의 정원문화원이 올해 공사를 시작해 2024년 7만㎡ 부지에 산림박물관, 숲속의 동화미굴관, 전시정원이 들어선다. 위쪽으로 ‘7성급 전망’이라는 금성산성이 있고 아래로 연동사와 저수지가 이어진다. 등산을 다니다가 절을 찾는 ‘등산불교’ 신도들이 많으니 절의 위치도 명당인 셈이다. 담양군의회 이규현 의원은 "원행이 고향 마을 후배라서 가깝게 지냈다. 만트라 공부를 많이 했고 국제명상센터를 세우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좀더 살았더라면 담양군과 연동사를 위해 의미 있는 불사를 많이 했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황량한 폐사터로 남아 있던 연동사가 담양의 명찰로 다시 태어났다. 눈 밝은 사람들은 한 승려의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움을 가꾸는 공력 그리고 법력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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