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⑳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의 격전지 금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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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2-01-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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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난공불락 금성산성" 선조에 보고
 

담양은 읍성(邑城)이 없는 고을이다. 불과 8km 떨어진 곳에 철옹성 같은 금성산성이 버티고 있으니 읍성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평시 산성에 곡식과 무기를 보관해 두었다가 적이 침입해오면 주민들은 성으로 들어가 농성전(籠城戰)을 벌이면 된다.
금성산성은 연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연대봉(煙臺峯)이라는 이름은 과거에 봉수대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1895년 고종 때 제작된 금성진도(金城鎭圖)를 보면 동헌 승대장청(僧臺長廳) 장교청 화약고 등이 들어서 있다. 성안에는 민가와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10 여 채 보인다.
장성의 입암(笠巖)산성, 무주의 적성(赤城)산성, 담양의 금성(金城)산성은 호남의 3대산성이다. 금성산성에는 곡식 2만 석을 저장해 두는 대규모 군창(軍倉)이 있었다. 조정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면 이 쌀을 진휼미(賑恤米)로 풀었다.

금성산성의 보국문. 성벽 아래가 바로 절벽이어서 외적의 공격이 어려운 곳이 많다. [사진=담양군 제공]

성밖으로는 험한 절벽이 이어져 적의 접근이 어렵다. 이래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거점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된 강항(姜沆·1567~1618)은 일본에서 적중견문록(敵中見聞錄)을 써 몰래 본국에 보냈다. 강항은 왜군들이 호남지방의 성들을 둘러보고 “이게 성이냐”고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산성을 보고 나서는 “조선사람들이 한사코 지켜냈더라면 우리들이 해낼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역을 통해 들었다고 적었다.
선조실록에도 금성산성을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평가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4도 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하고 온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선조에게 “담양의 금성산성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보다 낫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고 합니다” 라고 보고한다.
우리나라는 중부 이남 지역에만 1200여 개의 산성 터가 남아 있어 산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산성을 수축했다. 산성은 높은 성벽을 쌓는 대신에 산의 경사면이나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해 공력이 적게 들면서도 적의 공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외적이 산성을 공격하다 지치고 식량이 떨어져 퇴각할 때면 산성에서 내려가 적을 공격했다. 군인이 오래 주둔해야 하므로 성안에 우물이나 계곡의 물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유목민족인 흉노와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47일동안 청(淸)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왕실가족이 인질로 잡히고 식량이 떨어져가자 항복했다. 청은 조선이 제출하는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금성산성 쪽에서 내려다본 담양호. 천혜의 요새 지형이다. [사진=담양군 제공]

고려시대에 산성들이 많이 축조된 시기는 북방에서 몽고족이 침범하던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고종 43년(1256년) 전라도 지역까지 내려와 장성의 입압산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금성산성도 이때 이미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금성산성은 문헌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남원 공격을 준비할 때 금성산성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 먹인 뒤에 북상하려고 한다는 첩보가 기록돼 있다. 우왕 때는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잦았던 시기로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왜구가 침입했다. 고려를 멸망시킨 것은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왜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조선 태종 10 년(1410년) 전라 경상도에서 보수 또는 개축할 12개 산성 리스트에 금성산성이 들어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금성산성의 위치 규모 시설에 대해 간략한 개요가 들어가 있다.

담양 도호부의 북쪽에 있다. 둘레가 1803보(步‧걸음). 시내가 두 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샘이 12곳 있다. 그 가운데 다섯은 겨울이나 여름에 마르지 않는다.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하나 있고 이름은 덕기(德基). 자기와 도기를 굽는 곳이 1 개씩 있다.
 

금성산성 별장의 영세불망비. 비석이 마모된 데다 눈까지 내려 비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황호택]

등산로를 따라 보국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금성산성 별장(別將)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관아 앞에 있는 영세불망비와 달리 바위에 새긴 비석이다. 옛날 군인들이 보초를 서던 자리라고 한다. 종9품(從九品) 무관 벼슬에 영세불망비는 아무래도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 평시 산성에는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으니 제대 말년에 담양부사나 창평현감 흉내를 내봤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덕령 장군이 금성산성에서 바위를 훌훌 타고 넘는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는 포상에서 공을 엄격하게 따지라는 지시를 하고는 이항복에게 “김덕령을 어떻게 보는가”하고 물었다. 이항복이 “그의 외모를 보니 연소한 선비였으나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므로 무인들도 역시 복종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선조가 이어 “글을 잘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이항복은 “글을 약간은 안다”면서 “담양의 금성산성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매우 가볍고 민첩하게 걸어서 넘어갔다.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고 한다”고 답변했다.

김덕령 장군, 불끈 솟은 바위 가볍게 타고 넘어 

왜군과 용맹하게 싸우던 김 장군은 1596년 역모죄에 연루된 혐의로 한양에 붙잡혀가 거친 조사를 받다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1661년(현종 2)에야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이 활동한 거점이었고 1894년 동학혁명 때도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향토사학자 이해섭 씨의 역저(力著) 《금성산성》은 동학군이 금성산성으로 들어가 관군과 싸우다 진압되는 과정에서 페성(廢城)이 됐다고 기술한다. 금성산성은 그 후 한 세기 동안 폐허로 있다가 1995년 공사를 시작해 보국문 충용문과 북문을 복원했다. 전체 성곽 길이는 7.3km로 외성이 6.5km, 내성이 859m.

노령산맥이 금성산성을 향해 진군해오는 모습이다.[사진=황호택]

금성산성 보국문에 걸려 있는 '보수 현판문'에는 ‘1894년 12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3개월 동안 금성산성에서 은둔하면서 흩어져 있던 동학농민군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내용이 인터넷 블로그나 책의 기행문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논란이 있다. 금성산성 등산로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석에도 '전봉준 장군은 금성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옛 전우를 찾아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친구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됐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담양군과 이웃한 전북 순창군이 피노리에 세운 '전봉준 장군 피체(被逮) 유적비'에는 '전 장군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정읍 입암산성에서 백양사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김개남 장군을 만나기 위해 피노리에 피신중 체포됐다'고 기록돼 있다. 
  전 장군이 일본 영사와 대한제국 법무아문의 공동 조사를 받을 때 작성된 '전봉준공초(供草)'에는 전 장군이 체포되기 직전의 동선(動線)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전봉준 공초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23일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 밀려 내려오다가 11월 25일 원평 전투,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벌였다.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은 황급하게 쫓기는 처지가 됐다. 동학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박사는 “1894년 말 전봉준 장군이 패주(敗走)하는 동선에서 3개월 동안 금성산성에 은둔했거나 며칠이라도 가 있었던 기록조차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충용문의 설경. 아래로 눈에 덮인 담양호가 내려다보인다. [사진=담양군 제공]

전 장군은 11월 27일 태인 전투에서 패하고, 28일에는 입암 대흥리 동학접주 차치구의 집에서 잤다. 29일에는 입암산성에 찾아가 친분이 있던 별장 이종록의 호의로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30일 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와 입압산성을 나와 백양사 청류암에서 유숙했다. 입암산성 군졸이 와서 관군이 입암산성에서 수색하고 있다고 알려줘 백양사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이때 타던 말도 버리고 심복 세 명만 대동했다. 12월 1일 순창 장터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2일 체포됐다.
 전 장군이 체포된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가 금성산성과 가깝고, 담양 장성 광주 순창 등지에서 싸우던 동학농민군의 간절한 신앙이 금성산성의 녹두장군 전설을 만들어낸 것 같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후에도 동학군은 전국 도처에서 관군 일본군 민보군(民堡軍‧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양반층과 향리층이 결성한 민간 군대 조직)과 싸우다 소멸돼 갔다. 
 그로부터 13년 뒤 기삼연(奇參衍·1851~1908)의병장이 이끌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일본군과 마지막 일전을 치른 곳도 금성산성이다. 금성산성에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전투지인 현충시설임을 알리는 국가보훈처의 표지판이 서 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을 중심으로 4∼5개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부대다. 1908∼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임을 알리는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 안내판. [사진=황호택]


회맹소가 기세를 떨치는 지역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8년 기삼연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가 담양읍을 공격해 일제 침략기구인 우편소와 세무서, 군아 등을 점령해 각종 기물을 파괴했다. 그러고 나서 혹한을 피하고 설을 지내기 위해 천험(天險)의 요새인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날이 춥고 비가 쏟아져서 군사들의 의복이 젖어 얼고 굶주렸다. 미처 성을 지킬 준비도 하기 전에 뒤쫓아온 일본군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회맹소 의병은 일본군경의 기습을 받아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 의병장은 본진을 해산하면서 정월 보름 이후에 다시 모이기로 맹세하고 순창 구수동 친척 집에 잠적했다. 그런데 불시에 일본군이 20여 명이 이 집을 기습했다. 음력 설날이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은 해치지 말라." 기 의병장은 이렇게 말하고 걸어서 나와 광주읍 경찰서로 끌려갔다. 의병장을 탈옥시키려는 의병들이 뒤쫓아오는 데 불안해진 일본군은 기 의병장을 광주천변에서 총살했다. 회맹소의 마지막 전쟁터였던 금성산성은 기 의병장과 의병들의 항일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보국사 터의 당간지주가 폐사터임을 알려준다. [사진=황호택]


산성 안에는 보국사(輔國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금성사(金城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금성산성의 수호사찰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불탔다. 보국사 터에는 폐사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당간지주가 있다. 폐사터에 남아 있는 장대석(長臺石) 석축과 계단, 우물터 등은 금성산성의 피어린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항, 산성, 호남창의회맹소)》 한국학중앙연구원
2.<선조실록>《조선왕조실록》
3.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혁명사2》 교유당, 2020
4.이해섭 《금성산성》 담양향토문화연구회, 2000
5.《전봉준공초》 이이화 번역
6.홍명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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