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스승은 자연·자연을 담은 색 통해 치유 경험했으면 좋겠다”
박서보 작가의 홍시색은 따뜻했다.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예술가는 감성의 파장을 포착해야 한다. 색채를 느끼고 자신의 색으로 해석해야 한다. 내 스승은 자연이다. 자연을 담은 색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피가 뜨거웠던 젊은 시절 수행의 도구로 그림을 그렸다고 밝힌 90세 화백은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스승이라고 했다.

‘한국 단색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대가가 됐지만 박서보 화백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겸손했다.

2019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200호 작품을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연말까지 완성하겠다는 다짐에서는 끝없는 예술혼 그리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국제갤러리는 오는 10월 31일까지 K1에서 박서보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간 국제갤러리와 박서보는 국제갤러리(2014),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2015),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2016), 상하이 파워롱미술관(2018) 등에서 열린 유의미한 그룹전들을 통해 단색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여정을 함께 해왔다. 개인전 개최는 지난 2010년 이후 이번이 두 번째이다.

회화에 동아시아의 자연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담아냄으로써 한국의 모더니즘을 선도했다 평가받는 박서보는 줄곧 ‘왜 회화 작업을 하는가?’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변화하는 시대상에 부응하는 새로운 작업방식을 모색해왔다. 작업은 자신을 비우기 위한 수행의 하나였다.

그의 ‘후기 묘법’ 내지는 ‘색채 묘법’으로 알려진 2000년대 이후 근작 16점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자연에서 발견되는 선명한 색감과 주변 도시 경관의 보다 단조로운 색감이 혼재된 치유의 공간을 선사한다.

묘법 연작은 흔히 1970년대 초기(연필) 묘법,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의 후기(색채) 묘법으로 구분된다. 연필 묘법이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우고 수신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면, 색채 묘법은 손의 흔적을 강조하는 대신 일정한 간격의 고랑으로 형태를 만들고 풍성한 색감을 강조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작가의 대표 연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작가는 두 달 이상 물에 충분히 불린 한지 세 겹을 캔버스 위에 붙이고, 표면이 마르기 전에 흑연 심으로 이뤄진 굵은 연필로 선을 그어 나간다.

연필로 긋는 행위로 인해 젖은 한지에는 농부가 논두렁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좌우로 밀려 산과 골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물기를 말린 후 스스로 경험한 자연 경관을 담아 내기 위해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덧입힌다. 이렇게 연필로 그어내는 행위를 반복해 완성된 작품에는 축적된 시간이 덧입혀지고, 작가의 철학과 사유가 직조한 리듬이 생성된다.

 'Ecriture (描法) No. 120715'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박서보의 회화에서 색은 시대상을 드러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전후 시기의 원형질 연작에서는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불안의 정서를 표현한 검은색, 1960년대 후반 서양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응해 전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유전질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오방색, 그리고 1970년대에 ‘비워 냄’을 몸소 실천한 연필 묘법 연작에서는 색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흰색을 선택했다.

그러던 그가 2000년 이후 강렬하고 선명한 색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급진적인 시도는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던 그가 새로운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느낀 공포심과 무관하지 않다.

디지털 문명으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현대인들 누구나 겪는 시대적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상을 녹인 작업을 이어오던 그에게 ‘더 이상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고, 이는 스스로 작업 중단까지 고려하기에 충분한 배경이 되었는데, 그 끝에서 작가가 찾은 돌파구는 다시금 색이었다.

박 화백은 “디지털 시대인 21세기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21세기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라며 “70년을 성공했지만 71년 째에 모든걸 까먹고 망칠 것 같았다. 무척 떨렸지만 극복해보자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놨다.

작가는 관람객에게 의도된 경험을 강요하거나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화면에 정적인 고요함과 리듬감 있는 활력만을 남겨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흡인(吸引)하는 장을 만든다.

이는 그가 스스로의 작품을 ‘흡인지’라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화백은 “흡인지처럼 모든 사람의 고뇌를 빨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가 단색화를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생성된 흔적(물성)을 정신화 하는 것”의 세 가지 요소로 정의 내린 사실도 이 같은 회화의 새로운 역할을 뒷받침한다.

박 화백은 “색이 단색이라 단색화가 아니라”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이어 그는 “무늬만 단색화여서는 안된다. 정신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 누구도 못 따라오는 밀도감이 생긴다”라고 짚었다.

미술이 곧 방법론임을 주장하는 박서보는 여러 측면에서 회화에 내재한 기존 질서들을 전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캔버스에 유화물감과 연필로 작업해오던 그는 1980년대 이후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종이와는 달리 색과 빛을 흡수하는 성질의 한지는 ‘물아일체’를 실행하고자 하는 작가의 동양적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매체였다. 더 나아가 그 위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 즉 한지가 젖어 있는 동안 연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골을 만들고 음영을 부여한 건 연필이라는 도구를 종이의 원초적인 물질성에 굴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화면에는 연필의 흔적이 아닌 과정과 질서만이 오롯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색의 사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박서보 작가는 ‘주체와 대상,’ ‘인간과 자연’ 등의 대립항들로 분류해 접근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명명법에 도전해왔다. 색을 일컬을 때 도식화된 컬러판을 참고하는 대신 주로 자연을 칭하는 일반명사들을 차용한 건 그런 일환일 것이다.

이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색이 단수가 아니라 대상이 전하는 뉘앙스까지 포괄하는 온전하고 종합적인 색(감)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관람객의 체험을 전제로 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서도 삼청동의 풍경을 면하고 있는 창이 난 K1 공간에서는 공기색, 벚꽃색, 유채꽃색, 와인색을, 그리고 K1의 안쪽 전시장에서는 홍시색, 단풍색, 황금올리브색 등 박서보가 자연에서 화면으로 유인한 색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먹기 좋은 홍시색 작품은 기분 좋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달콤했다. 화폭을 가득 채운 홍시색이 나를 편안하게 감싸 안았다. 전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박서보 작가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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