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혹시 '포퓰리즘 독재국가' 꿈꾸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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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1-08-3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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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교수 ]

국민의힘 대선주자 12명이 지난달 25일 비전 발표회를 가졌다. 한 사람이 7분씩 자신의 공약과 비전을 내놓고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질의응답이 오가는 토론회 방식이 아니어서인지 내용도 분위기도 밋밋했다. 한 주자는 “초등학교 학예회 발표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정작 벼락 같은 화두는 그보다 보름 전인 11일 최재형 후보(전 감사원장)가 던졌다.

그는 국민의힘 초선의원 모임에서 “정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면서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지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민이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론의 기본철학을 피력한 것인데 여야 가릴 것 없이 즉각적인 반론과 비판이 쏟아졌다.

최재형이 꺼낸 ‘내 삶 내 책임론

반론은 대체로 △국민의 삶은 국민 스스로도 책임져야 하지만 대통령(정부)의 기본 책무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삶을 책임진다는 게 곧 그 삶에 대한 간섭을 뜻하는 건 아니다 △국민의 삶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려 하는가로 요약됐다. 최 후보도 즉시 반박했다.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판을 깔아주되 뒤처진 계층은 지원해서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본적 수준에서나마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할 국가는 예컨대 자유주의 국가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또는 전체주의 국가인가. 큰 정부가 맞는가, 작은 정부가 맞는가. 국가와 시장은 어떤 관계여야 하나 등과 같은 문제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가란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론도 대상임은 물론이다. 하나같이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지금과 같은 민족국가(nation state) 체제가 들어선 이래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온 난제들이다.

최 후보는 의도했건 안 했건 대선 토론회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국가’에 관한 이 논쟁은 국민의힘 주자는 물론 민주당 주자들의 공약과 정책까지도 아우르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선 주자로서는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국민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고, 모두가 국가 개입의 당위성을 되뇔 때 혼자만 국가, 곧 국가권력의 비대화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으니 용감한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후견국가’를 만들 참인가

시장주의자였던 하이에크(1899∽1992년)는 국가의 어떤 간섭도 그것이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음을 극도로 경계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위축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이에 대한 찬반을 떠나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임은 분명하다.

코로나 사태는 언젠가는 끝난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는 어떤 국가여야 하나. 이번 대선은 그런 거시적인 조망 속에서 치러져야 한다. 코로나로 삶의 절벽에 선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돕고, 이를 계기로 튼튼하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엮어나가되,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삶의 보편적 덕목으로 더 존중되고 발휘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최 후보가 그런 건설적 논의의 물꼬를 터준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선 주자들 중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몇 가지 부정적인 징후도 감지된다. 재난지원의 명목으로 막대한 지원금이 뿌려졌고, 또 뿌려질 터여서 포퓰리즘 시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국가가 국민의 후견인이 돼 모든 것을 돌보는 나라가 후견국가(後見國家)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이 부존자원인 석유에 기대어 그런 실험을 했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나, 정부에 대한 의존은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옳다. 후견은 피후견인(국민)이 미성숙하거나, 능력이 없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무려면 우리가 그런 국가를 원할까.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共生

포퓰리즘과 권위주의는 곧잘 ‘공생관계’를 이룬다. 대규모 지원과 현금 살포는 정부의 국정운영과 입법 활동 등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2020년 4‧15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것과 당시 정부의 대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연관지어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정부 들어서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쟁점 법안이나 주요정책들을 밀어붙인 일이 잦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포퓰리즘은 정권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지지율은 입법 폭주의 든든한 뒷배가 된다. 포퓰리즘이 권위주의 독재의 인큐베이터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인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은 저서 <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Twilight of Democracy : The Seductive Lure of Authoritarianism 2021년)에서 역사적으로 대 유행병이 국가권력의 팽창과 권위주의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치들에 동조하게 된다. 일부 국가에서는 질병에 대한 공포가 현대의 다른 불안정한 요소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세대에게 영감이 됐다”

그는 헝가리의 오르반 정권을 예로 들었다. “오르반 총리는 2020년 3월 자신에게는 대통령령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는 코로나와 싸우는 정부의 노력을 비판하는 언론인을 체포해서 최고 5년간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런 조치들은 과부하 상태인 헝가리 병원들에 필요하지도, 도움도 되지 않은 것으로 그저 논쟁을 봉쇄하기 위해 이용됐다.” 비상한 시기에 국가권력의 팽창은 권위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한 예다.

권위주의 독재의 조력자 ‘클레르’

애플바움의 이 책은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The People versus Democracy 2018년),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년)와 함께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룬 가장 널리 읽히는 책 중의 하나다. 애플바움은 자신의 이 책에서 민주주의를 흔드는 또 다른 주범으로 ‘타락한 지식인들’을 꼽는다. 그들 역시 국가의 비대화와 무관하지 않기에 잠시 소개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쥘리앵 방다(Julien Benda 1867∽1956년)는 1927년 <지식인의 배반>(La trahsion des clercs, 라 트라이종 데 클레르)이란 저서에서 “지식인들이 극좌, 극우 양 진영의 특수한 정치적 명분을 위해 ‘진리 추구’라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기 10년 전(1926년), 히틀러가 집권하기 6년 전(1927년), 이미 많은 작가, 언론인, 평론가 등이 정치적 사업꾼과 선전가로 변신해 문명세계를 폭력으로 물들였다고 했다. 방다는 이들을 비꼬아 “클레르”(clerc ‧ 성직자라는 뜻)라고 불렀다.

애플바움은 이 ‘클레르’들을 소환한다. 만약 우리 시대에 자유민주주의가 쇠퇴한다면 그건 현대판 ‘클레르’들 때문이라고 본다. “서구 자유주의 질서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의 가치를 훼손하고, 새로운 체계의 도래를 꾀할 사상가, 지식인, 언론인, 블로거, 작가, 예술가, 곧 ‘클레르’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애플바움은 좌우를 막론하고 권위주의 독재정치는 ‘클레르’들에 의해 중개되고 확산된다고 했다. 그 대목을 옮겨본다.

“…독재자에게는 반란을 조장하거나 쿠데타를 선동할 사람이 필요하다. 세련된 법률용어를 구사하며, 헌법 파괴와 법률 왜곡이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도, 불평과 불만을 자극해서 분노와 공포를 확산시키고, 다른 미래가 있다고 꾸며댈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독재자는 교육받은 지식인 엘리트들을 필요로 한다. 엘리트들(클레르들)은 독재자에게 반대하는 지성인들과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타락한 지식인들’의 宿主가 된 국가

나는 애플바움이 한국사회를 표본으로 놓고 이 글을 쓴 건 아닌지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가 언급한 인간형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심인물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잘 매치가 되는지 놀라웠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권위주의적 인간형’(authoritarian personality)은 “가족, 친구, 동료, 혹은 그저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 채 특정운동에 소속되거나 정당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성향을 가진다고 했다. 애플바움은 “그런 성향을 지닌 ‘기본적으로 외로운 개인들’”이라고 부연했다.

국가는 이런 클레르들의 숙주(宿主)가 된다. 포퓰리즘 브랜드로 치장한 오지랖이 넒은 국가, 권력으로 비대해진 국가일수록 숙주로선 안성맞춤이다. 한번 커진 숙주는 절대로 다시 작아지지 않는다. ‘클레르’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숙주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고, 더 많은 부자유와 속박을 감수해야 한다. 큰 정부든, 작은 정부든, 우리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가 벽돌이 되고, ‘클레르’가 모르타르(mortar)가 되어 지어질 언덕 위의 저 큰집을 원하지 않는다. 대선 주자 여러분은 어떤 국가를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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