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중국 최고의 개미투자자' 양화이딩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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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지 기자
입력 2021-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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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장 노동자서 백만장자로...양바이완 별명도

  • 국채 팔아 차익실현...반나절만에 1년 연봉 벌어

양화이딩(楊懷定). [사진=바이두 누리집 갈무리]

'중국 1세대 주식 투자자', '손길 한 번에 100만 위안', '양바이완(百萬, 백만)', '중국 주식의 신'...

중국 증시에서 주식으로 백만장자에 오른 양화이딩(楊懷定)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중국 개인 투자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그가 지난 13일 밤 별세했다. 향년 71세. 중국 개인 투자자들은 중국 1세대 투자자의 상징인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1950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생전에 베이징대, 칭화대, 난징대 등 중국 우수 대학에서 주식투자론을 강의할 만큼 인정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렸을 적엔 가난한 형편 탓에 고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하고 상하이 철 합금 공장을 전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8년 4월 그는 중국 정부가 상하이, 충칭 등 7개 도시에서 국채 거래 시장을 개인 투자자에게 개방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상하이 철 합금 공장을 그만두고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국채 거래는 104위안에서 시작했고, 이자율이 15%였다.

국채로 차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양화이딩은 전 재산인 2만 위안(약 349만원)을 쏟아부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영업점으로 돌아오니 국채 거래 가격이 104위안에서 112위안으로 상승해 있었다.

이날 양화이딩은 곧바로 보유 국채를 팔아 800위안을 벌었다. 이는 당시 물가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양화이딩이 철 합금 공장에서 받던 월급이 68위안, 1년 일해야 800위안을 겨우 벌 수 있었는데, 반나절 만에 1년치 연봉을 벌어들인 것이다. 

이후 그는 허페이, 허난성 등 지방을 돌아다니며 싼 국채를 은행에서 사다가 상하이로 와서 되팔았다. 저가로 사들여, 고가로 판매한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닌 지 1여년 만에 그는 채권 투자로 약 100만 위안(약 1억원)을 벌어들였다. 이때부터 그에겐 '양바이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의 진가는 1990년 상하이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당시 중국에선 주식 시장이 생소했지만 양화이딩은 정부에서 설립한 증권거래소가 향후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해 국채에서 주식으로 눈길을 돌렸다. 

양화이딩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1993년 대폭등장이다. 당시 상하이종합지수가 400포인트에서 1500포인트까지 상승하자 많은 사람들은 증시가 1800포인트를 찍을 것으로 예상하고, 자금을 쏟아부었다. 당시 양화이딩이 투자 리스크가 있다며 투자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상하이종합지수는 1000포인트 아래로까지 폭락했다. 양화이딩은 이미 1500포인트에서 보유 주식을 모두 매도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주식의 신'으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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