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리 컬렉션]④ 잃어버린 명성 한방에 찾아준 백남순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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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 기자
입력 2021-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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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0년대 1세대 한국 여성화가…남성화가 전유물이던 ‘대자연’ 그린 작가

  • 전성기 작품 6·25 때 피난 중 모두 소실…친구 선물로 준 8폭 병풍 ‘낙원’만 존재

  • 리움미술관서 소장하다 이번에 기증받아…이중섭은 오산학교 교사시절 그녀의 제자

백남순의 ‘낙원’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백남순(白南舜·1904~1994)은 1920~30년대에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하나였으나 가장 빨리 잊힌 작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작품 ‘낙원’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국내에 전문적인 미술학교가 없던 근대기, 1923년 12월 고려미술원이 연구소를 설치하고 수강생을 모집했다. 동양화에 김은호(金殷鎬·1892~1979)와 변관식(卞寬植·1899~1976), 조각에 김복진(金復鎭·1901~1940) 등 쟁쟁한 교수진 사이에, 서양화 교수진에는 나혜석(羅蕙錫·1896~1948)과 이숙종(李淑鍾·1904~1985)·백남순 등도 있었다.

아마도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나혜석이 관동대지진으로 잠시 고국에 돌아온 후배인 이숙종과 백남순을 교수진으로 불렀을 것이다.

당시 백남순은 1921년에 숙명여고 3년을 마치고 1923년에 경기여고 전신인 제일여고로 진학해 1923년에 졸업하자마자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을에 관동대지진으로 인심이 흉흉해지자 휴학하고 집에 왔던 터였다.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백남순을 두고 부모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배추를 다듬다가 배추벌레를 잘못 건드려 터지자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고는 그가 좋아하는 미술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든든히 해주었다. 그런데 하필 대망을 안고 유학을 떠난 그해에 지진이 났다.

이후 그는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부설 가명보통학교 도화 교사로 근무하며 '고려미전'에 작품을 내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도 입선했다. 동료 화가들은 그의 그림이 “눈이 번쩍 떠지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아침에 화구를 둘러메고 고요히 들길을 혼자 나설 때의 마음 또는 몇 가지 채색으로 말미암아 대자연의 일부가 전개될 때. 아! 그때 용솟음쳐 오르는 감회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신문 지면에서 발견하는 백남순의 감정을 결코 근대기의 과장된 표현법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이 '사람들이 화구통을 엿 상자라고 놀리고 닭똥을 바른다는 둥 몰이해하므로 서양화를 접었다'고 하였던 시절이었다.

대개의 화가가 꽃이 가득한 꽃병이나 꽃처럼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던 때였다. 여성화가 백남순이 대자연의 일부를 자신의 화폭으로 옮겨왔을 때의 환희를 고백하는 것이 어찌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 인상주의 여성 화가들조차도 자연의 묘사는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남순이 그리고자 했던 세계는 대자연이었다. 자연이 여전히 호기로움, 무위(無爲) 그리고 은거(隱居)의 영역에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인지한다면, 여성 화가가 대자연의 일부를 전개하는 꿈이야말로 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사로 착실히 급여를 모으고 오빠들과 교회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떠난 23세의 백남순은 파리에서 나혜석과 조우했다. 또한 '미국 예일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장학금으로 파리에 가게 된 청년이니 길 안내를 하라'는 오빠의 소개장을 들고 나타난 청년 임용련(任用璉·1901~?)을 만났다. 백남순은 일생에 후회되는 세 가지로 ‘파리에서 나혜석과 헤어진 것, 초지를 굽히고 결혼을 한 것, 6·25전쟁 중 작품을 유실한 것’을 꼽았다.

1930년 임용련과 결혼하여 인사차 들른 고국에서 '부부전'을 하고 떠나려 했지만, 오산학교 미술과 영어 교사가 된 남편과 함께 광복이 되기 전까지 오산학교가 있는 평북 정주에 머물렀다.

물론 학생 이중섭이 이들 부부가 있어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백남순이 화가로 성장하기 어려운 시기였음 또한 사실이다. 목시회 등 화가단체에 속하고 작품전을 하는 활동을 이어갔지만 7남매의 어머니이자 남편을 보조하는 삶은 만만치 않았다.

광복 후 다시 유학을 떠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임용련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백남순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사회사업을 하다가 1964년에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생존한 그의 모습이 1981년 <계간미술> 여름호를 통해 알려졌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그해 <계간미술> 가을호에는 세상에 살아남은 백남순의 작품 한 점이 소개되었다.

의사와 결혼하여 완도에 살고 있던 동료 교사였던 민영순에게 백남순은 화물 편으로 결혼 선물을 보냈다. 유채로 그린 캔버스를 이어붙여 만든 8폭 병풍이었다.

예전 신부의 혼수 중 하나였던 병풍을 결혼 선물로 줄 만큼 백남순의 그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던 모양이다. 민영순 또한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그 두꺼운 병풍을 도시를 옮겨 이사하면서도 절대 처분하지 않았다.

덕수궁 미술관 전시실 바닥에 흰 좌대를 놓고 세운 ‘낙원’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상단의 산세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동·서양화의 접목 혹은 서양의 재료로 동양의 정신을 그린다던 시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후에 리움미술관 유리장 안에 복원 처리되어 전시된 작품은 처음 보았던 누르스름한 그림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의 때를 제거하고 나타난 낙원에는 생생한 색채들이 가득했다.

8폭의 화면은 하나의 전경을 보여주지만, 만약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진 각각의 다른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서양화이지만 동양화가 갖는 절첩본의 기본을 이 작품은 지키고 있다.

가장 우측면부터 보자.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 굽이 도는 산길 저쪽에는 한 남성과 마치 신부 옷을 입은 것 같은 흰옷의 여성이 마주 보고 있다. 이 장면 때문에 백남순은 ‘낙원’을 민영순에게 결혼 선물로 보냈는지 모른다.

두 번째 면에는 폭포가 흘러내리고, 세 번째 면에는 아마도 저 멀리 집에서 걸어 나왔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상체가 드러난 여인이 있다. 네 번째 화면 전면에는 다리가 걸쳐져 있고 벼랑 위에 집이 있는데, 노를 젓는 인물이 있는 배들이 있다. 다음 화면은 어망을 걷어 올리는, 상체를 드러낸 어부의 뒷모습이 보이고, 다음 화면은 나뭇가지를 붙잡은 남성과 상체가 드러난 흰옷의 여인이 있는데, 이들 사이 왼쪽에 다람쥐가 한 마리 있다.

다음 화면은 일가족의 모습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해안가에 집들이 있다. 배가 향하는 곳은 동양의 이상향 무릉도원이고, 반라의 인물들은 이상향에 거주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엄혹한 시절, 도쿄와 파리를 누볐던 여성 화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의 꿈속에서 살아나 친구에게,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함께 꿈꾸던 친구의 손에 의해 지켜져 오늘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영어로 자신의 이름을 적고, 병풍 테두리까지 빛나는 장식으로 그려낸 백남순이라는 작가. 그의 ‘낙원’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과 처음 그때의 마음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조은정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국제평론가협회 정회원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2018~201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술자문위원(2018~2019)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2019~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작품소장기획위원(2020~현재)
석남미술이론상 수상, 구상조각평론상 수상
 

[사진=조은정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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