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上 휩쓸고 天上으로 올라간 故 김인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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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입력 2021-04-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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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년간 1568전 860승 5무 703패

  • 1967년 승률 88.31%·1968년 40연승

  • 김인국수배 남기고 천상으로 올라가

고(故) 김인 9단 [사진=한국기원 제공]


10대에 두려움 없이 서울과 일본으로 향했던 기사가 지상(地上)의 바둑판을 휩쓸고, 천상(天上)의 바둑판에 당도했다.

◆ 하늘로 올라간 국수(國手)

'영원한 국수' 김인 9단(1943~2021)이 지난 4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특2호실은 생전 김인 9단의 모습처럼 소박하면서도 조용했다. 빈소에는 바둑을 좋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자리했다.

한국기원은 63년간 한국 바둑계에 끼친 고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에 훈장 수여를 상신했다.

6일 오전 9시 한국기원장(葬)이 거행됐다. 2006년 조남철 9단(향년 82세)에 이어 두 번째다. 영결식에는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를 비롯해 한상열·윤승용 부총재, 곽영길(아주뉴스코퍼레이션 회장)·김상규·서효석·전재만 이사와 이종구 고문, 양재호 사무총장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에서 임채정 총재는 "한국 현대바둑의 발전을 이끈 선구자였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어른"이라고 회상했다.

발인 이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마친 유족들은 오후 2시 20분쯤 고인이 평생을 바쳤던 서울 성동구 마장로에 위치한 한국기원을 찾았다. 10분간 상주인 김산씨가 위패를, 신진서(21) 9단이 영정을 들고 한국기원을 돌았다. 그가 한평생 몸담아온 한국기원을 뒤로하는 순간이었다.
 

대국 중인 고(故) 조남철 9단(왼쪽)과 고(故) 김인 9단(오른쪽). [사진=한국기원 제공]
 

◆ 지상의 바둑판을 휩쓴 바둑 기사

고인은 지상의 바둑판에서 63년간 1568전 860승 5무 703패를 기록했다. 1967년에는 연간 승률 역대 3위인 88.1%(37승 1무 5패)를 기록했다. 1년 뒤인 1968년에는 불멸의 40연승(한국기원 최다 연승)을 기록했다.

1943년 11월 23일 전남 강진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3세에 바둑판과 함께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상경했다. 프로 기사가 된 것은 1958년인 15세 때다.

19세인 1962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그는 조남철에게 패배(1승 1무 3패)하고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조남철이 기타니에게 소개 편지를 써주었다. 기타니 도장 사범 시절 조치훈 9단(65)을 지도하기도 했다.

기타니 도장에서의 별명은 '호랑이'였다. 또한 신조어도 생겼다. 바로 '김죽림(金竹林) 시대'다. 고인과 오타케(大竹英雄), 린하이펑(林海峰)이 앞으로 바둑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뜻이었다.

귀국은 21개월(1년 9개월) 만에 했다. 표면상 이유는 병역 문제였다. 일각에서는 엄격했던 기타니 도장이 자유분방한 그에게 맞지 않았다고 봤다. 귀국 후 한국 바둑계를 휩쓸었다. 국수전 6연패, 왕위전 7연패, 패왕전 7연패 등 통산 30회 우승, 22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국수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은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다. 23세였던 고인은 '철옹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남철(당시 43세)에게 3-1로 승리했다.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대국에서 승리한 고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고인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간 제5~8대 기사회장을 지냈다. 고인의 시대는 1970년대 중반부터 흔들렸다. '호랑이'로 군림하던 고인은 30세를 넘기며 약해졌다. 이후 20대(조훈현, 서봉수, 김희중) 후배들이 사방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른바 춘추전국시대. 고인은 매일 술을 마셨다. 타이틀도 하나둘 빼앗겼다. 조훈현 9단(68)의 상승세에 한국 바둑 일인자 계보를 넘겨주고 말았다.

조남철에서 고인으로 이어진 한국 바둑 일인자 계보는 조훈현, 이창호 9단(46), 이세돌 9단(38), 박정환 9단(28), 신진서 9단(21)이 이어받았다.
 

한국기원 방문한 유족들. [사진=한국기원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 [사진=한국기원 제공]
 

◆ 변치 않는 청산(靑山), 김인국수배 남기고 천상의 바둑판으로

9단으로 승단된 것은 1983년이다. 2004년부터 고인은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때부터 17년을 한국기원 이사로 활동했다. 고인은 '김인국수배'를 남겼다. 이 대회는 2007년부터 고인의 고향(전남 강진군)에서 열린다.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로 시작해 지금은 국제 시니어 바둑대회로 상향됐다.

기풍은 중후(重厚)했다. 바둑판 앞에서는 듬직하면서도 두터웠다. 기풍처럼 기품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풍채가 좋았다. 소탈하고 호방한 선비 기질로 후배 바둑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후배들은 그런 그를 '변치 않는 청산'이라 불렀다.

풍채가 줄어든 것은 2006년 위암 수술 이후다. 좋아하던 술 때문에 탈이 났다. 15년 동안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이 활동했지만, 최근에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바둑에 대한 열정 하나로 13세 때 서울행 야간열차에 올랐고, 조남철을 이기기 위해 19세에 일본행을 택한 그는 지상의 바둑판을 휩쓸고, 천상의 바둑판 앞에 앉았다.

이제 그의 손에는 흰 돌과 검은 돌이 아닌, 흰 구름과 먹구름이 쥐어졌다. 지상에는 그와 똑 닮은 청산을 남겼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한국 바둑을 이끌 제2, 제3의 김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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