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돋보기] "지면 북한, 이기면 한국"…미얀마서 퍼지는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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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기자
입력 2021-03-2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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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민주항쟁 닮은꼴 미얀마 '8888시위'…한국과 달리 군부 사슬 못 끊어내

  • "33년 전과 다르다"…군부 독재에 디지털 저항하는 미얀마 MZ세대

최루가스 자욱한 미얀마 깔레이의 쿠데타 항의 시위 현장 [깔레이=AFP·연합뉴스]

 

"이번에 우리가 이기면 한국이 되고, 지면 북한이 된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 전역에서 항의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이 이어지면서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미얀마 시민들 사이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말이다. 한국이 1980년대에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미얀마도 민주화에 성공하겠다는 염원을 담은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달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국민 250명(21일 기준)이 목숨을 잃었고, 최근에는 '무차별 총격'에 이어 고문과 가혹행위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얀마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6월 민주항쟁 이듬해인 1988년 8월 8일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8888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과 달리 미얀마는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했다.

석원정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에 따르면 당시 미얀마 군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무자비하게 진압해 하루에만 최소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8888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 9월까지 이어졌지만,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약 3000명이 숨졌고 목숨을 건진 시위 참여자들도 정치범으로 몰리면서 군부 독재는 종식되지 않았다. 결국 미처 잘라내지 못한 군부의 싹이 33년 만에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국제사회 도움 절실" 재한 미얀마인의 눈물. [광주=연합뉴스]


한국은 미얀마에 '희망의 상징'으로 통한다. 과거 시민의 힘으로 군부독재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재한 미얀마 청년모임 회원인 수타진씨(28)는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 역사가 미얀마 국민들에게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그때의 실패로 30년 가까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한국은 성공해 오늘의 한국이 됐다. 촛불집회처럼 한국인들이 굳은 의지로 이끌어온 민주화의 역사가 우리에겐 큰 힘이 된다. 우리도 꼭 한국처럼 되고 말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대학원에 유학 중인 윤쉐진씨(25)도 "미얀마 시민들 페이스북에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를 모델 삼아 잘 싸워 보자'는 이야기가 많이 올라온다. 미얀마도 2021년은 이렇지만 2040∼2050년쯤에는 한국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홍콩의 한 정치 평론가는 외교안보 전문 매체 '더 디플로맷'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 1987은 미얀마 민주화 시위와 유사점을 보여준다. 논평가들은 민주화 운동이 길고 험난할지라도 끈기 있는 노력을 통해 결국 성공(민주화)을 이룰 수 있다는 예로 한국을 꼽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시위 사망자 장례식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유족. [양곤=AFP·연합뉴스]
 

미얀마 시민들은 민주화 시위로 제2의 한국을 꿈꾸고 있지만, 이를 저지하려는 군부의 움직임은 거세다. 군부는 지난주부터 휴대전화 인터넷을 차단한 뒤 탄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네트워크 모니터링 업체 '넷블록스'는 트위터에 "모바일 네트워크가 미얀마 전국적으로 차단됐다. 대부분의 사용자는 일상생활과 시위에서 휴대전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군정의 유혈진압과 각종 폭력을 시민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뒤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인권단체 '포티파이 라이츠'의 존 퀸리 선임분석가는 미국 CNN 방송에 "군사정권은 자신들이 자행하는 폭력 행위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다. 완전한 보도 통제 상황을 만들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미얀마 누리꾼은 "조만간 우리는 1990년대에 사용했던 2G(세대) 전화기나 라디오를 사용해야 한다"며 군부 조치를 향한 조롱 섞인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픽=김한상 기자]

"8888 시위 때와 다르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미얀마 젊은이들
미얀마 군부는 인터넷 차단 조치를 통해 외부와 소통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지만, 민주화 시위 주축을 이루고 있는 미얀마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연일 새로운 시위 방식으로 옛날식 군부 독재 방식에 맞서고 있다.

온라인과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주도하고 있는 시민 불복종 운동(CDM·Civil Disobedience Movement)은 주로 블루투스로 100m 이내 다른 사용자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스마트폰 앱 '브리지파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군부의 인터넷 차단에 대비한 것이다. 이 앱은 쿠데타 이후 몇 시간 만에 60만회 이상 다운로드되며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얀마 매체 이라와디는 "요즘 시위대, 특히 젊은이들이 온라인 대화방과 SNS로 집회를 준비하는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고 조직적"이라며 과거 '8888 시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군부의 휴대전화 인터넷 차단으로 인해 이제 2G 전화기나 라디오로 소식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네티즌들이 SNS에 올려놓은 사진. [사진=트위터 캡처]
 

미얀마 MZ세대가 경직된 시위 문화를 바꾸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매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벌어지는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는 카니발 축제와 닮았다. 그라피티 예술가는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을 그림을 통해 조롱하고, 만화가 노조는 직접 그린 피겨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과거 미얀마의 저항 역사를 보면 유혈사태에 굉장히 공격적이고 대립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접근 방식은 (군부를 덜 자극해) 위험을 줄이고, 더 많은 이가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고 평가했다.

한편, 최근 한국 정부가 미얀마에 최루탄 등 군용물자 수출을 금지한 것을 두고 미얀마 시민들 사이에는 반기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수타진씨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도와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더 큰 관심이 생기도록 널리 알려준다면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전에 저희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아주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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