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24 16:4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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