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백송 고사목 그루터기에서 사람 꽃이 피다.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입력 : 2020-09-01 18:59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하얀 소나무를 곁에 두고서 살고 있다. 언젠가 나무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지 줄기에는 땜질자국도 그대로 남아있다. 태풍에 가지라도 부러지면 관공서에서 득달같이 달려와 그 상태를 살핀다. 그렇게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인 ‘수송동 백송’은 오랫동안 종로 조계사 경내를 지켰다. 여름 뙤약볕 아래 고군분투하면서 사막 같은 절 마당에 홀로 서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여름 세한도(歲寒圖)’를 생각나게 한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계절 내내 소나무의 지조가 무엇인지 알려준다고나 할까.

수송동(壽松洞 소나무 동네) 혹은 송현(松峴 소나무 고개)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종로지역도 소나무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지나친 도시화로 인한 인구밀집지역이 되었는지라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개마루의 소나무 마저 간 곳이 없다. 이름만 남은 것이 켕겼는지 근래에는 고층빌딩 앞에도 훤칠한 소나무를 더러 옮겨 심기도 한다. 불교중앙박물관 주변에도 십여 년 전에 이식한 여러 그루 소나무들이 본래 제자리인 양 늠름하다.

소나무 역시 종류도 많고 또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궁궐 건축용 혹은 왕릉 주변을 지키는 금강송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희귀성으로 말하자면 백송이 으뜸이다. 백송의 원산지는 중국 북서지방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북경(北京·베이징)을 드나들 수 있는 실력자만이 만날 수 있는 나무였다. 소나무를 좋아하고 게다가 흰색을 선호하는 정서를 지닌 ‘백의민족’인지라 흰소나무를 만난 순간 '삘'이 꽂히면서 동시에 소유욕이 발동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북경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공식일정을 마치고 일행과 함께 관광을 겸해 인근지역에서 멀지않는 계단사(戒壇寺)를 찾았다. 계태사(戒台寺)라고도 불렀다. 당나라 때 창건한 이래 이름 그대로 모든 출가자들의 입문식(入門式)을 치르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북경을 중심으로 하북(河北허베이)성 지역의 모든 사찰의 수계식(受戒式)을 관장했다. 가람의 역사보다 더 시선을 끈 것은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묵었다는 백송인 구룡송(九龍松)이었다. 뿐만 아니다. 경내 여기저기 있는 몇 백년된 백송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더 놀란 것은 뒷산에 있는 나무숲이 전부 백송이라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의 문화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애지중지하며 돌보고 있는 조계사 경내에 있는 단 한 그루 백송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백송은 이 지역에서 흔한 소나무였다. 명나라 청나라 조야(朝野)에서는 별 비용을 들이지 않고 조선의 사신(使臣)과 귀빈들에게 큰 생색을 낼 수 있는 선물목록에 올렸다. 경쟁적으로 가져왔고 자랑삼아 심었다. 후손들은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요!”하면서 뽐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나무는 기후와 토질이 달라 이 땅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겨우 몇 군데만 살아남았다. 오늘날 국가의 보호를 받는 진짜 귀하신 몸이 되었다.

왕의 종친과 사대부들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킨 정원수 ‘백송’ 흔적을 찾아 북촌과 서촌을 거닐었다. 헌법재판소 경내에 있는 ‘재동 백송’이 가장 압권이다.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잘 가꾸어진 정원의 많은 나무들 속에서 거대한 브이(V)자형 흰색몸통과 기품있는 자태가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거의 신목(神木)의 반열에 들었다. 담장이 둘러쳐진 정문 앞에는 1인시위자들이 매일같이 서 있는 곳이다. 요즈음 코로나19 여파로 인하여 외부인 출입마저 금지된 지역인지라 백송은 그야말로 독야청청(獨也靑靑) 아니 독야백백(獨也白白)이다. 결국 뜻하지 않게 제 혼자 잘난 소나무가 되었다.

반대로 통의동 백송 터는 현재 가장 핫(hot)한 장소다. 예전부터 주택가 골목에 있던 수백년 묵은 백송은 지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1990년 태풍으로 넘어지면서 밑둥만 남긴 채 고사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재동백송’보다 훨씬 더 품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네주민들은 주변에 몇 그루의 후계목을 심었다. 하지만 이미 천연기념물 자격도 해지된 상태였고 아는 사람만 물어서 찾아오는 잊혀진 곳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그 곁에 ‘브릭웰(brickwell 벽돌우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건물이 완공되었다. 건축주는 밑둥만 남아있는 백송 터 때문에 이 땅을 구입했다고 한다. 백송 터의 자취에 호응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건축을 원했다. 그 결과 건물1층은 밑둥만 남은 백송은 물론 거주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열린공간으로 꾸몄다. 비움으로 인하여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는 광장 아닌 광장이 된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브릭웰과 백송 터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줄지어 찾아왔다. 더불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명소로 이름을 드날렸다.

밑둥만 남은 죽은 나무가 사람을 모으는 능력을 갖추고서 다시 살아난 셈이다. 사실 재동 백송처럼 사람들이 와서 봐주지 않는 나무라면 살아있다고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자기 발로 찾아오게 만드는 그루터기라면 죽었다고 해도 죽은 게 아니다. 동네 한가운데 좁은 골목에 살던 오래된 백송이 수명을 다한 자리에 주민들이 다시 ‘새끼’ 백송을 심었고 개념있는 건축주의 지혜가 더해져 건물 안으로 공원을 끌어들이면서 이제는 모두가 행복한 곳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어쨌거나 터도 자기 역사를 가진다. 변하지 않는 터가 어디에 있으랴. 왕실과 고관대작이 살던 서촌 북촌의 백송 터는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에서 관공서로 혹은 사찰로 바뀌었고 또 사옥과 여염집이 되었다. 그리고 머무는 사람도 계속 바뀐다. 아무튼 세 군데 백송은 수백년 동안 그 터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오늘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조계사 백송] 

[서촌 통의동 백송]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munsuam@hanmail.net
코로나19 재난구호 후원하기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