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A] 타이완 리덩후이 전 총통, 97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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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슌스케 기자/ [번역] 이경 기자
입력 2020-08-0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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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민주화의 아버지 리덩후이 총통이 7월 30일 서거했다. =2018년 6월 오키나와 (사진=리덩후이 기금회 홈페이지)]


타이완의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7월 30일, 타이페이 시내 병원에서 97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총통 재임기간 그는 이완의 민주화를 위해 크게 공헌했다. 경제면에서도 농업경제학자였던 이력을 살려, 1990년대의 타이완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본통치시대에 타이완에서 태어났으며, 말년에는 일본-타이완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관계자에 의하면, 평소에도 "일본인이여, 자신감을 가져라"는 주장을 이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리 전 총통은 30일 오전 7시 24분,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장기부전 등으로 서거했다. 타이완 언론에 의하면, 리 전 총통은 올해 2월 8일 식사중에 목이 막혀 입원한 후, 병원 검진 결과 폐, 신장의 기능부전 등으로 입원이 장기화되었으며, 7월 23일 이후부터는 혼수상태에 빠졌있었다.

타이완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30일, 이 전 총통을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타이완 민주화 과정에서 리 전 총통의 기여는 대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리 전 총통의 공적을 치하했다. 리 전 총통이 2001년까지 소속되어 있었던 중국국민당도 이날, "리 전 총통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줬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31일,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는 코멘트를 밝히며, 동시에 "일본과 타이완의 친선관계에 다대하게 공헌하신 분"이라며 리 전 총통을 그리워했다.

■ 무혈 민주화 추진
리 전 총통은 1971년 국민당에 입당, 1988년 타이완 출신자로는 최초로 총통에 취임했다. 2000년에 퇴임할 때까지 약 12년간 6번의 개헌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1994년에는 최초의 구 타이완성장과 직할시장 직접선거, 1996년에는 최초의 총통직접선거(본인이 당선)를 각각 실시했다. 취임 당시는 중국국민당의 사실상의 독재 하에 있던 타이완을 민주주의 사회로 변모시켰다.

리 전 총리가 주최하는 리덩후이 기금회의 하야카와 토모히사(早川友久) 고문은 리 전 총통의 최대 공적은 피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추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당 간부는 전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하야카와 고문에 의하면, 당내에서 고립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리 전 총통은 내부 보수파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정치개혁에 임해왔다고 한다.

■ 1인당 GDP 약 2.3배로
리 전 총통은 정치면 뿐만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타이완에 큰 공적을 남겼다. 임기중 연간 경제성장률은 대략 6~9%를 유지했으며, 1988년에 6370달러(약 67만엔)였던 1인당 역내총생산(GDP)을 2000년에는 1만 4908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중국에 대한 투자규제를 완화해, 중국경제의 확대를 타이완 경제 성장으로 활용했다. 한편 임기 후반에는 중국에 대한 자금유출로 인해 타이완 경제에 공동화가 초래.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계급용인(戒急用忍:어떤 일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추진함)정책'을 실시했다. 미중무역갈등을 속에서 문제시되고 중국의존에 대해 일찍부터 경종을 울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야카와 고문은 "리 전 총통은 원래 농업경제학자여서, 국민당 내에서는 경제정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는 과정 속에서 입지를 굳힌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곧잘 정치개혁의 성과에 가려지곤 하지만, 경제면에서도 충분한 성과를 올린 정치가였다.

■ "일본통치의 밝은 면을 봐 줬으면 좋겠다"
리 전 총통은 일본이 통치하던 시기인 1923년에 타이완에서 태어났다. 쿄토제국대학(현재 쿄토대학)에 진학하는 등 일본어로 교육을 받는 등 평생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하야카와 고문에 의하면, 특히 말년에는 일본-타이완간에 교류활동에 힘써왔다. 리덩후이 기금회는 매년 3회, 일본인 50여명을 타이완에 초청해, 타이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한 연수과정을 개최했다. 리 전 총통은 이 연수에서 매번 강연을 실시했으며, 일-타이완의 상호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반복해서 강조한 말이, "일본의 젊은이들이 더욱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메시지. 하야카와 고문에 의하면, 리 전 총통이 일-타이완 교류를 촉진하는 배경에는 일본인들에게 일본통치가 타이완에 가져온 공적을 보여줌으로 인해 자신감을 갖기를 바랬다고 한다.

일본의 타이완 통치에 어두운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보다 많은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 일본어 세대가 점점 없어지고, 일-타이완간에 상호 이해가 점점 없어져가는 것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리 전 총통은 그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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