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주의 지구본色] 이탈리아와 코로나19와 입맞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문은주 기자
입력 2020-03-12 16:12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伊정부, 첫 확진자 발생 40여일 만에 '키스 금지' 정책

  • 사망자 900명 육박하자 '지역 봉쇄' 등 강력 조치 내놔

  • '일대일로' 우정 확인한 중국 정부 지원에 숨통 트일까

이탈리아의 유명 초콜릿 업체인 '페루지나'는 113년 역사를 자랑한다. 다양한 초콜릿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제품은 'Baci(바치)'다. 바치는 입맞춤(bacio·바치오)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에서 따왔다. 파란색 겉포장지를 뜯으면 얇은 은박에 싸인 초콜릿이 모습을 드러낸다. 은박을 벗기면 초콜릿과 함께 가로 4cm, 세로 2cm 크기의 종이가 나온다. 이 종이에는 우정과 사랑 등을 주제로 하는 명언이 4개국어(이탈리아어·영어·독일어·스페인어)로 인쇄돼 있다. 낭만을 더한 일종의 포춘쿠키다. 그런데 이 낭만적인 '바치'라는 단어가 최근 이탈리아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마스크 써야 하는데 이제 와서 키스 타령? 

지난 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정부가 '키스와 포옹 금지' 정책을 꺼내들었다.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다. 포옹과 입맞춤 등의 스킨십이 일상적인 문화임을 고려하면 사상 초유의 정책이다. 지난 1월 말 첫 번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40여 일 동안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에 비춰보면 중앙정부가 얼마나 다급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먹구구식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밀라노에서 교사로 일하는 I씨는 요즘 외출시에 마스크를 꼬박꼬박 챙긴다.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에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이병자 또는 감염자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창궐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마스크를 쓰고 있는 동양인들을 식당에서 쫓아내는 등 동양인 혐오 현상이 일어난 것도 그런 맥락이다. I씨도 마스크 착용에 익숙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그나마 4월 3일까지 밀라노 내 휴교령이 내려진 만큼 당분간 마스크에 대한 부담이 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김한상 기자]


그나마 I씨의 경우 행운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통상 마스크를 의료용으로 활용한다. 일반인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문화가 없으니 당장 마스크를 쓰고 싶어도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코로나19로 사망자가 수백명이나 발생했는데도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국가적인 권고를 내놓지 않는 이유다. 정부에서는 아직도 감염된 사람들에 한해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이탈리아 정부의 대응 방식이 허술하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일단 국민 스스로가 마스크를 구비, 착용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다 확진자 동선 추적 등 기술적인 시스템도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나온 대응책 10가지도 발열시 외출 자제, 회의 보류 등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겨냥했다기보다 일상적인 생활방식에 불과한 수준이다.

때문에 현지에서는 '키스 금지 정책'의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찌감치 봉쇄 조치된 북부 볼로냐에 거주하는 V씨는 "마스크가 이탈리아에 원래 잘 없는데 지난달부터 품절이라 더 구하기 힘들다"며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통 인사할 때 키스를 하는데 (키스 금지는) 규칙을 잘 안 지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특징을 봤을 때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게 더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너무 느린 정무 속도 '분통'...믿을 건 중국뿐?

11일 현재 이탈리아 내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만2462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날 대비 22% 늘어난 수치다. 사망자도 전날 대비 31% 증가한 827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코로나19의 발원지로 알려진 중국 우한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다. 병원에도 호흡기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넘쳐나자 트위터 등 SNS에서도 불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증상으로 사망한 여동생과 갇혀 있다며 "우리는 완전히 버림 받았다"고 올린 한 이탈리아 남성의 트윗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도 했다.
 

11일(현지시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동자제령 등 긴급 사태가 선포되자 이탈리아 로마의 명물인 트레비 분수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위스는 소규모 검문소 9곳을 폐쇄 조치했다. 이탈리아 정부도 부랴부랴 '전국 이동제한령'을 내놨다. '키스 금지' 정책을 내놓은 지 사흘 만이다. BBC 등 외신에 따르면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11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생필품 판매장을 제외한 모든 상점에 휴업령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박물관과 성당, 학교 등 모든 공공시설을 폐쇄 조치한 데 이어 다시 한 번 강력한 카드를 꺼낸 것이다. 아예 △생필품 구매 외에는 집 밖에 나오지 말 것 △외식하지 말고 집에서 식사할 것 △주말 통행 금지(피렌체시) 등의 지침도 내려왔다. 

피렌체에 본사를 둔 유명 명품업체에 근무하는 A씨는 요즘 집에서 근무를 했다. 육아 정책의 일환으로 재택근무를 택하는 직원이 있긴 하지만 전 사적인 재택근무가 이뤄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가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재택근무를 적극 장려하고 있어서다. 여기다 이동제한령이 나오자 회사는 아예 4월 3일까지 이탈리아 내 모든 매장의 문을 닫겠다고 통보했다. 매출이 급감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상황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뒤늦게나마 긴급 자금도 마련했다. 일단 코로나19 관련해서만 250억 유로(약 34조385억원)의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초 편성했던 예산보다 3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의료시스템과 방역 등 급한 불부터 끈다는 입장이다. 다만 대응 효과가 불확실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는 처지다. 콘테 총리 스스로도 대국민 담화에서 "이번 대책의 효과가 나오기까지 몇 주 걸릴 것"이라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이동제한령을 내린 가운데 11일(현지시간) 밀라노 두오모 광장을 비둘기들이 채우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이탈리아 정부가 중국에 손을 내민 것도 다급한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지 언론인 일수시디아리오의 10일 보도에 따르면 루이지 디 마이오 이탈리아 외무장관은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전화통화를 통해 "현재 의료 물자와 설비 등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탈리아는 앞서 2019년 3월 2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 당시 중국 주도의 '신(新)실크로드 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주요 7개국(G7) 중에 일대일로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이탈리아가 처음이다.

중국이 코로나19 사태를 활용해 일대일로 강화에 나선다면 이탈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일단 중국 정부는 의료진 파견과 마스크 등 의료 물자 지원을 약속했다. 다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행정 조치를 감안할 때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원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탈리아는 중국 우한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유럽에서는 가장 먼저 우한발 입국자의 입국을 금지 조치했었다. 자국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을 때는 중국과의 모든 항공편을 차단하기도 했다. 바치 초콜릿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처럼 중국의 지원이 이탈리아와 중국 간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