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에 민본주의를 꿈꾸다

입력 : 2020-02-11 16:32
정약용이 걸었던 한강변 '기다림의 길'
 

<24> 정약용이 걸으며 사색했던 한강변 '기다림의 길'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다산은 고향에 돌아와 환갑을 맞는 해에 자서전 같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쓰며 삶을 정리할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갔다. 무덤에 넣는 묘지명과 달리 문집에 들어가는 묘지명은 역사적 복권을 위해 쓴 자서전처럼 길게 썼다. 두 아들이 보도록 조그만 첩(帖)에 장례절차에 관한 유명(遺命)도 기록했다. “뒷동산에 매장하고 지관(地官)에게 물어보지 말라. 묘 앞에는 비석과 망주(望柱)를 세우지 말고 상석(床石)만 두어라…염할 때 몸을 끈으로 묶는 것은 신체에 대한 모독이니 묶지 말고 몸을 편하게 관에 넣어라.”
다산은 왜 생가 바로 뒤 동산에 묘를 썼을까. 다산은 지방관을 하던 아버지(정재원)를 따라 이곳저곳 옮겨 살다 고향에 돌아와 “남녘땅 수천리를 노닐었으나 쇠내(마재) 같은 곳을 찾지 못했다”고 감회를 말했다. 그는 75년의 일생 중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강에 생을 의존하는 마재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죽어서도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산은 여유당 뒷동산에 묻혀 후손과 자신이 쓴 책들을 지켜보고 싶었을 것이다. 귀양지에서 쓴 500여권의 책은 요즘 책 분량으로 치면 70~80권에 해당한다. 한강물이 여유당 지붕마루를 넘은 을축 대홍수에 4대손 정규영은 목숨을 걸고 물에 잠기는 책 궤짝을 구해 저자의 무덤에 대피시켰다.
 

다산은 자신이 죽으면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뒷동산에 매장하라는 유명을 남겼다. [사진=유대길 기자]


다산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당대에 인정 받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내용은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찬묘지명에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고 썼다. 묘지명에 쓴 호 사암(俟菴)은 ‘초막에서 기다린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지관은 부르지 말라고 했을까. 다산은 풍수를 중국 원산의 최대 미신이라고 불신했다. 남양주에는 왕과 대신들의 무덤이 많다. 풍수에 정통한 지관들이 잡아둔 명당일 터다. 다산은 ‘풍수론(風水論)’ ‘풍수집의(風水集議)’라는 글을 통해 풍수의 미망(迷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생가 뒷동산에 묻어달라" 죽어서도 보고 싶은 그곳

언젠가는 지관이 다산에게 자신이 잡아준 길지(吉地)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산줄기의 기복은 용과 호랑이가 일어나 덮치는 형세이고 감싼 산줄기는 난새와 봉황이 춤추는 모습이다. 아들과 손이 고관대작이 될 것이 틀림없다. 천리(千里)에 한 자리 있을까 말까한 길지다.”
다산은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면 어째서 지관의 모친을 모시지 않고 남에게 주었느냐”고 물었다. 지관의 답변을 소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답변을 제대로 못했던 모양이다.
‘부조(父祖)의 사체를 땅에 묻고 복을 바라는 것은 효(孝)나 예(禮)가 아닐뿐더러 그럴 리도 없다 … 일세를 통솔하고 만민을 부리던 영웅호걸이 살아서도 자손의 죽음과 질병을 막지 못하는 일이 많거늘, 하물며 무덤 속 말라빠진 유골이 산하의 형세를 차지했다 한들 자손에게 복록을 줄 것인가.’
그는 간지(干支)에 대해서도 고대 기일법(紀日法)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으로 생사와 길흉을 판정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사람의 상은 이미 결정돼 있다는 고정관념에 따라 용모를 보고 사람의 자질과 운명을 판단하는 결정론적 사회통념도 ‘상론(相論)’을 통해 비판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재마을 앞에서 합류하는 모습을 담은 항공사진. [사진=경기문화재연구원]


조선시대 한강은 교통로서의 기능이 컸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마재마을은 요즘의 고속도로 분기점 같은 곳으로 배를 타고 한양과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마현은 북한강의 물길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남한강에 밀려 모래가 옮겨와 퇴적작용으로 생긴 지형이다. 사구(沙丘)에 촌락을 이룬 마재는 농토가 비좁았다. 거주민의 상당수가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마재마을과 건너편 광주 분원 사이의 한강을 소내, 쇠내, 또는 우천이라고 불렀다. 한양으로 가는 상인들은 마재의 쇠내나루를 거쳤다. 쇠내장터에는 큰 우시장이 있었다. 소들이 싼 똥을 거둔 것이 인근에 언덕을 이루었다는 말이 내려온다. 강을 건너면 바로 궁궐에 납품하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만드는 광주분원이었다.
다산은 고향 마재마을에 대해 ‘오곡은 심는 것이 없고, 풍속은 이익만을 숭상하고 있으니 낙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취할 점이라곤 오직 강산의 뛰어난 경치뿐’이라고 기술했다.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이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남겨놓고 있다. 겸재 정선의 독백탄(獨柏灘)이 대표적이다. 그림 왼쪽으로 기암괴석이 보이고 가운데는 한강이 펼쳐져 있는데 고기잡이 배가 외로이 떠있다. 강 중간에는 작은 섬들이 보이고 그 멀리 산들이 중첩된다.

겸재 정선의 독백탄(獨栢灘). 그림 오른쪽 위가 운길산과 수종사이고 산 아래로 내려와 왼쪽 끝이 마재마을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1801년 멀리 유배지 장기(포항)에 있을 때에는 나무와 숲이 우거진 남자주섬과 맑은 모래가 뒤덮인 석호정을 그리워했다. 난생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그가 고향 마을 풍경을 그려 허름한 집 벽에 걸어놓고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마재마을은 정약용에게 학문의 원류일 뿐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었다.
마재(馬峴)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에서 발굴한 쥐만한 크기의 철마(鐵馬)에서 유래했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정기를 눌러놓고 가기 위해 쇠말을 묻었다는 것이다. 마을에 역병이 돌거나 비명에 간 죽음이 생기면 마재마을 사람들은 말이 좋아하는 콩과 보리를 삶아 제사를 지냈다.

묘지명에 쓴 俟菴(사암)은 '초막에서 기다리다' 뜻

다산은 이 전설을 믿지 않았다. 만약 왜인(倭人)이 정기를 눌러놓기 위해 철마를 만들어 묻었다면 그런 비술(祕術)을 소문 내고 갔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쇠말이 산천의 정기를 누르는 것임을 알았다면 뽑아내 버리거나 달구어 식칼을 만들어 버리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비는가. (다산시문집, 철마에 대한 변증) 이 작은 일화 하나를 통해서도 다산의 사유는 과학적이고 논증적임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최익한은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유당 전서를 독(讀)함’이라는 글에서 다산의 이 글을 논하며 인류학적 분석을 했다. ‘철마를 숭배하는 제사는 기마민족이 군마(軍馬)를 소중히 여기는 현실적 관념에서 발원한 유속(遺俗)이고 말 성황신(城隍神)은 조선 각처에 퍼져있는 민간신앙’이라는 것이다.
최익한은 1955년 북한에서 저술한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사회개혁가로서의 관점을 제공한다. 최익한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지만 정치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꾸준히 다산과 관련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을 연구한 최익한은 해방 후 월북해서도 다산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다. 1928년 최익한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의 모습.


다산이 강진 유배 중에 쓴 시 ‘대주(對酒)’는 문벌과 계급, 지역차별이 인재를 고사시키는 현실을 통탄했다. 사회개혁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 시다.

서북사람들은 항상 눈살을 찌푸리며
서족(庶族)들은 많이 통곡한다.
그리고 한 줌도 못 되는 수십 집만이
대대로 국록을 도맡아 먹는구나.
그중에도 그들은 패를 나누어
서로 죽이고 엎치락 뒤치락한다.
약한 놈의 고기를 강한 놈이 먹어
남은 건 겨우 대여섯 호족뿐이라.
이들로 삼정승 육판서 삼고…

이 시에서 ‘서북’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말한다. 조선시대 세조 이후에는 홍경래란 등 반란이 자주 일어난 서북지방 출신을 관리로 등용하지 않았다. 양반의 서족(첩실의 자녀)도 차별을 받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다산은 민권주의(民權主義) 사상을 설파한다. 목민지관(牧民之官)은 협의적(狹義的)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을, 광의적(廣義的)으로는 치자(治者)계급 전체를 가리킨다.
다산은 고대시대에 목(牧), 즉 치자의 발생과 성립과정에 대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부정했다. 탐관오리들의 죄악이 목도(牧道)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통치자가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牧爲民有)’고 결론 내렸다.
조선에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 사대부들은 줄곧 ‘애민(愛民)’의식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정약용이 이를 ‘위민(爲民)’으로 바꾼 것이다. 백성을 대하는 인식과 방식을 바꾸는 ‘페러다임’의 대전환이었다.
다산은 고전적 사례와 용어를 사용하며 당시 지배계급의 눈을 과도히 자극하지 않는 합법적 표현을 썼다. 멸족(滅族)의 위기에 몰렸던 다산으로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與猶)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민주제도를 주장하고 군주제도와 왕권신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비합법적 논문’이라고 최익한은 해석한다.
 

다산이 자신의 꿈이 이뤄질 미래를 사유하며 걸었던 한강변 "기다림의 길"[사진=유대길 기자]


다산은 1798년에 편찬한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사람의 고름을 이용하는 인두접종법과 소의 천연두인 우두을 이용하는 접종법을 소개했다. 다산이 매우 빠르게 서양의 신(新)의술인 종두법을 배운 것이 신기할 정도다. 중국을 내왕하는서양 선교사들이 우두술에 관한 소책자를 펴내 포교에 활용했고, 다산이 이를 일찍 손에 넣은 듯하다는 것이 최익한의 추론이다.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위민주의, 민본주의도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목민심서를 쓴 것은 1818년. 다산이 중국을 다녀온 사람이나 서적 등을 통해 영국의 권리장전(1628년),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 프랑스대혁명(1789년) 등에 나타난 인민의 평등권과 자유권, 왕권의 제약 등에 관해 학습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산이 꿈꾸던 진정한 爲民의 정치···아직도 미래형

다산은 관의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된 환곡(還穀)의 폐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른 농지의 공동 분배, 공동경작 등을 주장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대지주가 수확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고 세금 부담까지 떠넘기는 바람에 소작인이 수탈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보려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농지개혁안이다. 최익한은 다산의 경제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18세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온건한 개량론에 그쳤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멸문지화(滅門之禍)의 공포 속에서 표현의 수위를 조절한 다산의 저술을 마르크스·레닌주의 관점에서 개량론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시대에 대한 이해와 예의가 부족한 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한강을 따라 걸으며 '위민' 정치를 실현하는 방도에 관해 사유를 거듭했다. 진정한 위민 정치는 지금 이 시대에도 미래형이다. 묘지명에서 사용한 사암이라는 호처럼 정약용은 자신의 꿈이 이뤄질 시대를 기다렸다. 한강의 물줄기를 타고 봄, 여름, 가을에는 사람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바삐 오갔고 겨울에는 갈대숲에서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가 날아 올랐다. 정약용이 사색했던 한강변 길은 '기다림의 길’로 남아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을 맞는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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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
협찬-MDM 그룹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민족문화대백과사전
2.경기마을 기록사업⓷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 경기문화재연구원
3.최익한 전집1 실학파와 정다산, 서해문집, 최익한
4.최익한 전집3 여유당 전서를 독함, 서해문집, 최익한
5.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다산이오, 산처럼, 김형섭
5.정약용의 마현에서의 삶과 교유관계, 제3회 전국대학(원)생 다산학술논문대전, 윤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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