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8-10] 애국가 속의 ‘하느님’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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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9-12-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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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 아닌 '神樣'으로 표기…아마테라스, 일본인의 '하느님' 의미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 상해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 행사에서 단상에 있던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향해 한 ‘조선인 공산주의자(윤봉길)’가 수류탄을 던졌다. -1932년 4월 30일 윤치호 일기

∙ 조선신궁에 가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었음을 천조대신과 명치천황 신위께 알리는 봉고제를 드렸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거대한 군중들 앞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선창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7년 7월 1일 윤치호 일기

∙ 서울 집. 오전 8시 조선신궁에 가서 황실 신위께 새해맞이 참배를 했다. 오전 9시부터 오전 10시 15분까지는 늘 하듯이 총독, 조선군 사령관 등을 방문하여 새해맞이 인사를 했다. -1940년 1월 1일 윤치호 일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1907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쓴 애국가 원본 가사와 해방 이전 악보에는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던 것을 후일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 ‘하느님’으로 개사했다.

천주교에서는 하느님, 천도교에서는 한울님, 단군을 신앙하는 대종교에서는 한얼님, 국민 일반에게는 넓은 의미의 하늘, 또는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정도로 이해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려져 있는 상태다.

애국가 가사 자체가 윤치호가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지은 찬송가인 '찬미가'의 15장 중 끝 부분인 14번 장의 찬송 가사다.

'찬미가' 속 애국가의 존재는 윤치호의 작사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애국가가 특정 종교에 치우쳤다는 증거다. 대한민국은 특정 종교국가가 아니다. (헌법 제20조 제②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헌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국교(國敎)가 없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 가사에도 ‘하느님’(영어로는 God, 중문·일문으로는 ‘神’으로 표기)이 나오고 ‘국가(national anthem)’란 문자 그대로 한 나라의 찬가이기에 애국가에 얼마간의 종교적 색채와 국가주의 경향은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이 기독교의 여호와가 아니라 일본의 국교 신토(新道)의 ‘하느님(하나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왼쪽)윤치호 1907년 작시 '찬미가'의 15개 장 중에서 끝부분인 제14장 찬송가사. (오른쪽)윤치호 애국가 친필본과 애국가 전문이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1908) 에머리대학 소장.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애국가의 ‘하느님’은 일본인의 ‘하느님’?

'겨울연가'로 배용준은 일본에서 ‘욘사마(ヨン様)’라는 이례적인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파급력과 인기를 얻었다. ‘욘사마’는 ‘용준’의 일본식 준말인 ‘욘’과 우리말로 ‘님’을 뜻하는 일본말 ‘상(氏)’의 극존칭인 ‘사마(様)’의 합성어다.

일본은 8만개의 신사, 800만 신들이 산다고 하는 신(神)의 나라다. 8만개의 신사는 온갖 신들을 모시고 있고 일본인들은 그 신들이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신사를 참배한다. 신 중에서도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일본왕실의 조상신이자 일본인의 최고신 ‘카미사마(神様)’로 극존칭한다.

아마테라스 별칭 역시 ‘오이세사마(お伊勢様)’, ‘진메이사마(神明様)’ 등 극존칭 ‘사마’가 붙는다. 아마테라스의 부모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아마테라스의 형제 자매 '폭풍의 신' 스사노오와 '달의 신' 츠쿠요미 등 주요 신을 비롯한 800만의 신들의 별칭에 ‘사마’를 붙인 신은 없다.

일본은 신토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최고신 여호와와 이슬람교의 최고신 알라 등 세계 모든 종교의 최고신도 ‘神様(카미사마)’가 아닌 ‘神(카미)'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의 애국가 1절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神樣の御加護ある我が国万歳”로 번역하고 있다(일본어판 위키피디어 참조). 즉 애국가 속의 '하느님'을 ‘神’이 아닌 ‘神樣’으로 번역한다. 일본은 한국 애국가의 ‘하느님’만 '神樣'으로 표기하고 여타 200여 나라의 국가에 나오는 세계 모든 종교의 최고신을 '神'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국의 국가 ‘하나님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an)'를 ‘神よ女王を守り給え’로, 탄자니아 국가 ‘주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God bless Africa)'를 ‘神よ、アフリカに祝福を'로 브루나이의 국가 ‘국왕에게 알라의 가호가 있기를(Oh Allah bless His Majesty’)을 '国王陛下に神のご加護'로 표기한다. 제목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 국가 가사에 나오는 모든 최고신은 일률적으로 ‘神’으로 표기한다.

오로지 한국 애국가의 ‘하느님’만 ‘神’이 아닌 자국의 ‘하느님’ 아마테라스와 똑같게 ‘神樣’으로 표기하고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天樣の御加護)라는 식의 용어도 일본의 인테넷 일어사전 ‘goo国語辞書’에 정치 경제 사회 IT 등 상용어구로 30만개 이상 수록되어 있다. 도대체 일본은 왜 이러는 걸까?
 

일본어→ 한국어 번역기에 神樣과 神을 넣어보았더니 각각 ‘하나님’, ‘신’으로 번역된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동아일보> 1925.10.21. 후렴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라는 애국가를 작사하고 근화를 무궁화로 최초 표기한 윤치호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윤치호의 하느님은 과연 누구인가?

필자는 지난 8월경 무궁화를 톺아보면서 국내 종일매국, 반역세력의 대부이자 영원한 롤 모델인 윤치호가 ‘애국가’를 최초 작사하고 무한팽창이라는 뜻의 ‘무쿠게( むくげ)'를 ‘무궁화(無窮花)'로 최초 작명했다는 사실을 실은 일제 강점기 신문 기사를 발견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5년(大正 14년) 10월 21일자 관련 기사이다. 맞춤법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다.

'現代에 無窮花'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무궁화(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젊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붙게 되여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는 윤치호씨(尹致昊)씨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가 잇서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대 태어난 --- 영원무궁하소서. 附屬되어 생기었다고 하는(?)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합니다.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 윤치호가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를 작사하고 ‘근화’를 ‘無窮花’로 사상 최초 표기했다는 사실을 실은 동아일보의 기사는 ‘윤치호=애국가 작사자 겸 무궁화 도입자’ 의 핵심 증거의 하나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는 1904년 8월 일본제국에 대한제국의 모든 정책결정권을 상납한 갑진늑약(제1차 한·일협약)을 외부대신의 인장을 불법탈취하여 체결했고, 1905년 11월 외교권을 상납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1909년 11월에는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사살된 이토히로부미 추도행사 한국 측 대표를 맡았다. 합방 이듬해 1911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제식민지 지배해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3·1독립운동을 윤치호는 3·1 폭동이라고 모독했다. 1931년 9월 3일 조선인 최초로 조선신궁에서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집전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에서 일본침략군사령부 이동체를 섬멸한 윤봉길 의사를 공산주의자로 비하했다.(1)*
그의 영문일기에는 일본인의 ‘하느님’ 아마테라스를 배향한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 383개 계단을 친히 올라가 예배드렸다는 조선신궁 참배 기록이 51회나 적혀있다.(2)* 일제 침략군이 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30만 대학살을 개시하고 있을 때 그는 조선신궁에서 제사장으로서 난징함락 일본군 승전기념제전 봉고제를 집전하는 등 신사의 최고위 신관만이 맡을 수 있는 의식을 수차례 도맡아 했다. 1940년 5월 22일 윤치호는 ‘이토 히로부미’의 성 ‘이토’와 비슷하게 읽히는 이토지코(伊東治昊)로 창씨개명하고 수십만 조선청년들을 일제 침략 전쟁터로 내모는 봉고제 제사장을 맡았다. 마침내 그는 친일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도 못해본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우리 민족의 아버지 미나미 총독이 총을 메고 나서라면 총을 메고 나섭시다. 우리 반도 민중도 일본 내지 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윤치호(이토지코), 그의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여호와인가? 신토의 ‘하느님’인가?
윤치호의 뼛속까지 종일매국의 본색과 위선적인 적그리스도 행태를 윤치호 영문일기(국사편찬위원회, '윤치호 일기 1~12권' 탐구당, 1971년)(3)*와 언론 보도, 조선총독부의 동향분석,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특비문서 등에서 살펴본다.


◆젊은 시절 윤치호 일기

이 세계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神이다. - 1890년 2월 14일 (미국 에모리 대학 유학시절 만 25세)

∙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나라’를 정할 수 있다면 일본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는 지긋지긋한 냄새가 나는 중국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 및 차별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미국 또는 지긋지긋한 정권이 존재하는 한 조선에서도 살고 싶지 않다. 오, 축복 받은 일본이여! 동양의 낙원이여! 세계의 동산이여! - 윤치호 영문일기 1893년 11월 1일 (도쿄체류 시절, 만 28세)


∙나의 좁은 마음은 영어로 신(God)이라 불리는 존재의 정의와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점점 더 만약 신이 친부라면, 신의 부성에는 사랑과 연민이 결여된 것은 아닌지 의혹을 품게 된다.
-1900년 12월 25일(원산항 재판소 판사 시절 만 35세)


젊은 시절부터 윤치호는 정의와 사랑의 신을 의심하고 일본과 힘의 신을 믿었다. 1883~1943년 그의 나이 18세부터 78세까지 60년간 매년 12월 25일 일기를 전수 분석한 결과,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1885~1886년, 1887년, 1892~1895년, 1902년, 1916~1918년, 맨 마지막 1932년 모두 열두 해의 크리스마스만 언급되어 있다.

나머지 마흔여덟 해의 12월 25일 일기에는 크리스마스는 일언반구도 없이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3·1운동으로 무수한 동포(특히 농민과 학생들의 희생이 제일 많음)들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던 해 1919년의 크리스마스 윤치호 일기는 민족과 종교를 떠나 그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된다.

-1919년 12월 25일 목요일 잔뜩 흐리고 추움
새말 집이다.(중략) 4년 전에 가장 일을 잘 하는 농사 일꾼은 1년에 15엔과 옷 세 벌, 식사를 제공받았다. 이제 그들은 1년에 40엔과 다른 조건들을 요구한다.


◆중·노년시절 윤치호 일기

(1) 새해 첫날 일기 

1930년대 이후 죽을 때까지 <윤치호 일기>를 살펴보면 윤치호는 기독교 교회 예배보다 조선신궁 예배를 더 많이 했다. 특히 매년 설날에는 조선신궁에 가서 반드시 일본인의 하느님 천조대신과 명치일왕의 신위에 새해맞이 참배를 했다. 그리고 늘 하듯이 7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총독과 조선군 사령관 등을 방문하여 새해맞이 인사를 했다.

-1939년 1월 1일 일요일 눈, 온화함
오전 9~10시 조선신궁에 가서 새해맞이 예배를 드렸다. 아침 8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오전 11시까지 계속 내렸다. 총독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새해인사를 했다.


-1940년 1월 1일 월요일 맑고 온화함
서울 집. 오전 8시 조선신궁에 가서 황실 신위(神位)께 새해맞이 참배를 했다. 오전 9시부터 10시 15분까지는 늘 하듯이 총독, 조선군 사령관 등을 방문하여 새해맞이 인사를 했다.


-1941년 1월 1일 수요일 맑음
서울 집. 오전 8시 조선신궁에 가서 새해맞이 참배를 했다. 9시 10분에는 양주삼 박사와 함께 늘 하던 대로 총독 관저 등등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했다. 총독이 없어 카드만 남겨두고 왔다.


-1943년 1월 1일 금요일 청명, 영하 4도
오전 10시 조선신궁에 가서 신년하례식에 참석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10시 50분쯤 하례식이 끝나자마자 김활란과 함께 여느 때처럼 총독 등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했다.



(2) 일본인의 축일 관련

한국 기독교(감리회)의 태두 윤치호의 1933년 이후 일기엔 천황탄신일, 조선신궁 참배, 봉고제 집전, 일본인의 하느님 천조대신 예배 등 각종 일본인의 축일이 모두 81회나 나오는 반면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등 기독교 축일은 언급조차 없다. 윤치호의 ‘주님’은 누구이며 이 자가 작사한 애국가 속의 ‘하느님’은 과연 누구인가? 1938년~1939년 윤치호 일기 중 네 편만 싣는다.

-1938년 10월 1일 토요일 흐리고 시원함
서울 집. 오늘은 조선총독부 체제가 들어선 지 28년째 되는 기념일이어서, 오전 9시에서 10시 30분까지 총독부의 모든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신궁에서 신도 의식에 따라 감사예배가 열렸다.

-1938년 11월 3일 목요일 흐리고 해가 남
서울 집. 오전 9시 총독부의 모든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신궁에서 신도 사제들이 메이지 천황의 탄신일을 축하했다.

-1939년 3월 10일 금요일 온종일 대체로 흐림
서울 집. 국군의 날이다. 34년 전 오늘 무크덴 대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 이에 힘입어 욱일승천한 일본제국은 러일전쟁을 발발하게 되었다. 오전 11시 30분 조선신궁에 가서 가와지마장군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과 황실의 선조 영령들께 참배했다.

-1939년 11월 24일 금요일 안개 후 맑음
서울 집. 10시 30분 조선신궁 구내 언덕 중턱에 세워진 황국신민 서사비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 비는 광택이 도는 네 개의 화강암 기둥으로 떠받쳐진 돌로 된 아름다운 선반 위에 서 있다.


◆언론보도· 조선총독부· 경성지법 검사국 문건

(왼쪽)1910년대 남산과 조선신궁. (오른쪽) 남산중턱의 조선신궁, 여의도 전체 면적보다 넓고 신궁본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수는 383개. 윤치호느 이 계단을 수없이 올라 일본인의 하느님 아마테라스를 예배하고 봉고제 등 의식을 집전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더욱 심각한 윤치호의 반민족, 반기독교 행적은 당시 언론보도와 조선총독부의 문건, 경성지법 검사국의 특비문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1)언론 보도

윤치호 남경함락전첩 봉고제 집전 보도 (조선일보 1937년 12월 13일)

∙조선신궁 사무소에 윤치호·한상룡·최린 등 25명이 모여 일본군의 국위선양에 대한 기도제를 거행키로 가결하다. – 동아일보 1937.8.24.

∙ 윤치호, 노도이 만세 남경함락을 축승- 남경함락전첩 봉고제(난징30만대학살)를 남산 조선신궁에서 집전하다.
– 조선일보 1937.12.13.

∙ 각도 대표의 열화 같은 폭영분쇄(暴英粉碎)의 사자후, 조선신궁 대광장에 넘친 노호, 윤치호의 연설   – 동아일보 1939. 7. 23.


1937년 8월 23일 윤치호는 조선신궁에서 일제의 무궁한 영광을 비는 기원제 발기인 겸 위원을 맡았고 9월에는 기원제 위원장에 취임했다.

1937년 12월 13일 조선신궁에서 남경함락전첩 봉고제(난징30만 대학살)를 집전했다. 1938년 2월 7일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회장 자격으로 조선신궁에서 봉고제를 집전했다.

1938년 7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을 일본인의 하느님 천조대신과 명치일왕 신위에 고하는 조선신궁 봉고제를 집전했다. 다음달 8월 조선기독교연합회 전국 평의원회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앙기독교 청년회가 세계연맹에서 탈퇴하여 일본에 예속된 일본기청(基靑)조선연합회의 회장을 맡았다. 1939년 2월 11일에는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그해 7월 23일 중국을 지지하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기 위하여 조직된 ‘경성배영(排英:영국배척)동지회’의 회장을 맡아 조선신궁에 나아가 대규모 군중시위를 지휘했다.

기원제 위원장이나 봉고제는 신사의 최고 책임자 궁사 또는 차석 신관이 맡게 되어 있다. 신사의 평신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윤치호는 만년에 기독교의 교회보다 일본 신토의 하느님을 모신 조선신궁에서 살다시피했다.

(왼쪽)윤치호 남경함락전첩 봉고제 집전 보도 (조선일보 1937년 12월 13일), (오른쪽)조선신궁에 모인 군중과 행진광경과 인사말하는 윤치호 사진(동아일보 1939년 7월 23일)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2) 조선총독부 문건

ㅇ 1931년 9월 3일 조선신궁에서 기독교도인 윤치호를 대표로 하는 각계의 대표 백 수십 명 발기인들이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거행하였다. - 조선총독부, '심전개발정책운동の종교담론', 1935.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차원에서 개신교의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하기 7년전 조선인 최초로 조선신궁에 나가 기원제를 주재했다.

ㅇ 1938년 8월 5일 조선기독교도의 지도상황 지휘부 설치
∙ 총지휘부(서열 순)
1. 미나미南次郞(조선총독), 2.윤치호(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겸 일본기독교청년회 가입 교섭대표) 3.유억겸 4.신공숙 5.山本中興(일본기독교청년회동맹 회장) 6.齊藤惣(일본기독교청년회동맹 총무), 7.김활란(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일본여자기독교청년회 가입 교섭대표) 8.유각경 9.박마리아
/설립 목표 : 조선기독교도의 황국신민화, 동방요배, 국기게양탑, 국기에 대한 경례, 황국신민의 서사, 신사참배, 조선기독교의 내선일체 - 조선총독부 '昭和 13年 年報 제47보'


특히 총독에 이은 서열 2인자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 현지인 총리격으로 군림했는가를, 당시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장 겸 일본기독교청년동맹 가입 교섭대표를 맡았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3)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특비문건

① 미나미 총독, 윤치호에게 반도청년에 대한 지도원리 요강시달
ㅇ문서번호: 지검비(地檢秘) 제1403호, 지검비(地檢秘) 제1404호
발신자: 경성지방법원 검사정(檢事正), 수신자 : 조선총독부 법무국장, 발신일 : 1938년(소화13년) 9월 07일
참조 : 경고특비(京高特秘 제8582호
ㅇ요약: 반도청년지도에 일언일행일치 황국신민으로서 인격을 양성할 것, 조선인의 사명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달려있음. 내선일체의 충랑된 황국신민으로서 조선기독교도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에 앞장서는 선구역할을 할 것을 지시


②기독교조선감리회 애국일 실시계획

ㅇ문서번호 : 경서고비(京西高秘) 제9309호, 발신자: 경성 서대문경찰서장. 수신자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발신일 1938년(소화13년) 9월 30일
ㅇ요약: 기독교 조선감리회 최고지도자 윤치호는 기존 20여개 종교단체연합체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해산하고 기독교 조선감리교회를 일본감리교회에 편입시키는 의식을 거행했다. 윤치호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애국일 실시계획을 밝힌 후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왼쪽부터) 지검비(地檢秘) 제1403호, 경고특비(京高特秘 제8582호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친필서명, 총독이 윤치호에게 반도청년에 대한 지도원리 요강시달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윤치호, 수십만 한국 청년을 죽음으로 내몬 조선신궁 악마의 봉고제

애국가 작사자 겸 무궁화 도입자 윤치호(이토지코)는 한국의 앳된 청년들을 일본 침략전쟁의 총알받이용으로 떠나보내는 죽음의 의식을 거행하는 조선신궁 봉고제를 도맡았다.  이와 관련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비밀문건은 아래와 같다. 

∙조선방공협 경기도연합지부의 결성식 거행
'京高特秘 제2196호'(1938-09-19)
∙ 흥아보국단설립준비회 개최 '京高秘 제2372호' (1941-08-25)
∙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 거행 '京高秘제2569호의 7' (1941-10-24) 등


이들 문건의 공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윤치호의 영문일기와 일제강점기 대표 월간지 '삼천리'에 윤치호가 쓴 기사 하나를 살펴본다.
 

윤치호는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조선청년부대의 입영봉고제를 자주 집전했다. 봉고제 전속신관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윤치호 일기>

-1938년 7월 1일《금요일》 흐림
오후 2시에는 모두 조선신궁에 가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었음을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 신위(神位)에게 알리는 봉고제(奉告祭)를 드렸다. 2시 30분에서 4시 사이에 소나기 또는 폭우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거대한 군중들 앞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선창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8년 7월 31일《일요일》 맑음. 무더움.
새벽에 용산역으로 나아가 만주-러시아 국경으로 가는 용감한 조선청년 부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얼마전 내가 조선신궁에서 봉고제 입영식을 거행한 청년들이다. 그들을 실은 여섯 량의 기차가 장도에 오를 것이다.

-1943년 8월 1일《일요일》 무더위. 비.
오전 7시 조선신궁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오늘부터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됨을 알리는 신도교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삼천리>

일제강점기 대표 종일매국 월간잡지 <삼천리> 의 최고 필진은 단연 '무궁화 삼천리' 국토참절.
일왕찬가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다. 윤치호의 모든 글은 매월 <삼천리> 잡지 맨 앞에 항상 대서특필됐다. 그중 한 편만 고르면 아래와 같다.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끝까지 읽기 힘들다.

<삼천리> 제12권 제7호 (발행일 1940년 07월 01일)
제목: 군국다사(君國多事)의 가을(秋)에 지원병 10만돌파, 지원병 모자(母姉 어머니와 누이)에 보내는 서(書)
필자 : 조선지원병 후원회장 윤치호


조선의 여러 모자(母姉 어머니와 누이)에게 이 국가다사한 때에 간절히 한가지 말슴을 하고저 하는 것은 여러분은 소중한 자식과 옵바를 병사로 내어보내주섯스니 진실로 감사함니다. 지원병제도가 실시된지 겨우 3년만에 금년드러서 벌서 그 지원자수가 전 조선에 10만명을 돌파할 지경이라하니 이러틋 기쁜 일이 어디 있음니까.
이것이 모다 조선의 어머니요, 조선의 누이로 태어나신 당신들이 평소에 자녀를 잘 교양하였을분더러, 최근에 이르러는 더욱이나 세상 시국이 엇더케 도라가는 것을 깊이 깨닷고 나라를 사랑하는 높은 마음이 움지기는데서 나온 뜻인줄 아옵니다.
지금은 개인주의적 생각에서 너나할 것 없이 모다 반성하고 각성할 때임니다. 모다 개인의 이익을 뒤로 미루고,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몬저 생각할 때임니다. 국가가없이 무슨 평화한 가정이 있으며, 어듸에 질서있는 사회가 있겠음니까. 학문도, 생활도, 사교도, 생산도 모도다 국가가 있은 뒤에의 일임니다. 여러분은 이미 보섯슬 것임니다. 白耳義, 和蘭, 波蘭, 佛蘭西 이 모든 나라의 패전국의 모양을. 거기에 사는 어머니는 제 아들을 아츰저녁으로 슬하에 안어보지 못함니다. 기기에 사는 백성들은 하로 두끼의 밥도 마음대로 잘 먹지 못함니다. 우슴은 거두어지고 가정의 단란은 바서지고, 문명의 시설도 파훼되어 있음니다.
우리는 나라부터 직혀야 함니다. 나라부터 사랑해야 함니다. 자기의 가정을 직히려니까 더욱 나라를 직혀야하고, 자기가 속한 이 사회를 사랑하려니까, 더구나 이 나라를 사랑하여야 함니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여러 길이 있겠지만 그중에도 웃듬이요, 제일 크고 빗나는 길이 나라의 병정이 되어서 폐하께 목숨을 드리는 일이 그것이외다. 이렇게 놉고 거룩하고 큰 일이 어디 있겠음니까.
이제 만주사변이래 지나사변을 거처서 조선반도에는 상하층에 모다 군사열이 높아지고, 애국의 충성이 사사건건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심히 기뿐 일이외다.
아모조록 君國에 바치는 이 정성이 더욱 끌어서 이 앞으로 지원병을 희망하는 건실한 청년이 여러 십만, 여러 백만이 나게 하도록 여러 母姊님께서 잘 지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올시다.





◆◇◆◇◆◇각주

(1)*안창호씨가 상해에서 체포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상해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 행사에서 단상에 있던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향해 한 ‘조선인 공산주의자(윤봉길)’가 수류탄을 던졌다. 만약 안창호가 그 비열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면, 혹독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윤치호 영문일기 1932.4. 30.

(2)*조선신궁 참배 윤치호 일기 51건
1. 1925년 9월 29일《화요일》 화창하고 따뜻함. 2. 1935년 2월 11일《월요일》 맑음. 쌀쌀함.
3. 1935년 4월 29일《월요일》 사랑스럽고 시원한 날. 4. 1935년 12월 4일《수요일》 흐리고 더욱 온화한 날
5. 1938년 2월 11일《금요일》 흐리고 약간 추움. 6. 1938년 4월 29일《금요일》 청명.
7. 1938년 5월 21일《토요일》 음울. 8. 1938년 5월 27일《금요일》 흐리고 후덥지근함.
9. 1938년 7월 1일《금요일》 흐림. 10. 1938년 7월 7일《목요일》 온종일 비.
11. 1938년 9월 13일《화요일》 맑음. 12. 1938년 9월 16일《금요일》 맑음.
13. 1938년 10월 1일《토요일》 흐리고 시원함. 14. 1938년 10월 7일《금요일》 흐리고 시원함.
15. 1938년 10월 17일《월요일》 오전에 맑음. 16. 1938년 10월 28일《금요일》 맑음.
17. 1938년 11월 3일《목요일》 흐리고 해가 남. 18. 1939년 1월 1일《일요일》 눈. 온화함.
19. 1939년 1월 6일《금요일》 화창하고 살을 에는 듯이 추움. 20. 1939년 3월 10일《금요일》 온종일 대체로 흐림.
21. 1939년 3월 15일《수요일》 맑음. 매우 추움. 22. 1939년 4월 25일《화요일》 맑음.
23. 1939년 4월 29일《토요일》 흐리고 시원함. 24. 1939년 6월 14일《수요일》 오전 흐림.
25. 1939년 6월 24일《토요일》 흐림. 비. 26. 1939년 7월 7일《금요일》 이른 아침에 흐렸다가 해가 남.
27. 1939년 7월 22일《토요일》 땡볕더위. 28. 1939년 7월 30일《금요일》
29. 1939년 10월 1일《일요일》 맑음. 30. 1939년 11월 3일《금요일》 흐림. 쌀쌀함.
31. 1939년 11월 23일《목요일》 흐림. 때때로 햇빛이 창백함. 32. 1939년 11월 24일《금요일》 안개 후 맑음.
33. 1940년 1월 1일《월요일》 맑고 온화함. 34. 1940년 1월 3일《수요일》 오전 흐림. 오후 맑음.
35. 1940년 2월 11일《일요일》 흐림. 온화함. 36. 1940년 3월 15일《금요일》 오전 맑음. 오후 4~6시 눈.
37. 1940년 6월 14일《금요일》 햇볕이 옅고 따뜻함. 38.1940년 7월 7일《일요일》 흐림. 찜통더위.
39. 1940년 9월 5일《목요일》 흐림. 음울. 40. 1940년 10월 9일《수요일》 청명.
41. 1940년 10월 17일《목요일》 맑음. 42. 1940년 11월 10일《일요일》 음울. 추움.
43. 1940년 11월 23일《토요일》 흐림. 44. 1941년 1월 1일《수요일》 맑음.
45. 1941년 2월 11일《화요일》 흐림. 아주 추움. 46. 1941년 8월 24일《일요일》 비. 시원함.
47. 1943년 1월 1일(음력 11월 25일)《금요일》 청명. 영하 4도. 48. 1943년 2월 11일(음력정월7일)《목요일》 청명. 영하 3도. 49. 1943년 5월 14일(계미년4월11일)《금요일》 아침에 흐리고 쌀쌀함.
50. 1943년 7월 25일《일요일》 비. 51. 1943년 8월 1일《일요일》 무더위. 비.

(3)*<윤치호의 첫 일기> 1883년(명치 16) 1월 1일(월, 맑고 춥다)
관직·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국기를 달았고, 사녀(士女)와 아동들은 새 옷으로 화사하게 차려입고 세배를 다닌다. 울긋불긋한 색깔이 거리에 가득하여 한층 번화하게 보이는데, 상점은 모두 문을 닫고 사람들이 한가로이 나다닌다. 그 태평한 기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날 오후 4시에 다나까 다다요시(田中忠義)를 찾아가다. 도소주(屠蘇酒; 새해에 마시는 일본 술) 3잔을 마신 후에 그의 처자들이 모두 와서 인사를 한다.

<윤치호의 마지막 일기> 1943년 10월 7일 《목요일》 맑음
아내 매려의 언니가 새벽 1시에 영면에 들었다. 애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축하할 일이다. 그 여자는 살아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일본예찬으로 시작하는 윤치호의 첫 일기와 처형의 죽음을 차라리 축하할 일이다 라고 쓴 그의 마지막 일기, 처음부터 끝까지 그로테스크하다. 그의 인생처럼.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 『윤치호일기 1권~12권』, 탐구당 19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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