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소탈하고 따뜻했던 인간 구자경…'호랑이 선생님' 별명 붙기도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백준무 기자
입력 2019-12-14 13:3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체육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지요. 정말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구나 하면서요."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제자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고인에 대해 이 같이 회상한 바 있다. 구 명예회장은 회사에 합류하기 전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누구보다 소탈하고 따뜻했다는 게 '인간 구자경'에 대한 평가다.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호랑이 선생님' 별명

구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슬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시한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부터 구 명예회장은 장래 희망으로 교사를 꿈꿨다. 지수초등학교 재학 당시 과학을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으로 자연 친화적인 삶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사의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희망'을 주제로 한 작문 시험에서도 주저 없이 교사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구 명예회장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후 1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게 된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수시로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며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독려하기도 했다.

교직 생활 중 그는 중학교 진학반인 6학년 담임을 줄곧 맡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일제 시대의 책을 참고해 스스로 교재를 만드는 가 하면 산수와 과학의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기도 했다.

◆3대 구본무 회장에게도 "가족이라도 실무경험 없으면 승진 없다"

이같은 구 명예회장의 가치관과 경험은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5월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구 회장은 회장 취임 전까지 20여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다. 평소 아버지인 구 명예회장이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구 명예회장 본인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0년간 현장에서 경영인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기업의 회장직 승계자는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구 회장은 회사의 가장 기초조직인 과장 책임자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경영실무와 경영자적 리더십 및 안목을 쌓아갔다.

구 명예회장의 여러 가르침과 교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중 하나는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였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구 명예회장은 구 회장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을 지키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구 명예회장의 철칙도 구 회장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항상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으면서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해왔다.

◆모교 후배 서울 방문 때 직접 멀미약 챙기기도

'상남(上南)'이라는 아호 또한 구 명예회장의 소탈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그의 호칭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이러한 아호를 지었다.

‘상남’은 고향집 앞에 증조부인 만회 구연호 공이 놓은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도랑을 치고 호롱불을 밝혀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던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은퇴한 뒤 머물렀던 연암대학교의 농장 내 사무실도 공사장이나 작은 상가의 사무실로 여겨질 만큼 수수하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25년 간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회장직을 지낸 구 명예회장은 은퇴 후 일체의 허례와 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그야말로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은퇴 후 모교인 지수초등학교 후배들의 서울 방문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떠날 때는 사진을 같이 찍고 선물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직접 멀미약을 챙겨주자, 학생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현역 시절의 열정과 노력하는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는 기술개발에 매진했던 경영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LG그룹 관계자는 "고인은 시련 많은 현대사 속에서도 기업경영의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남보다 앞선 생각과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경제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던 큰 기업인이었다"며 "회장으로 25년간 외롭고 힘든 공인의 입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와 오늘날 LG를 일궈낸 진정한 참 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차를 시승하며 환하게 웃는 구 명예회장.[사진=LG그룹 제공]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