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 신하가 독도에 영토비 건립 건의 사료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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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최주호 기자
입력 2019-12-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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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도 독도사료연구회, 새로운 내용 발굴

승정원일기. [사진=경상북도 제공 ]

조선 정조 때 신하가 독도에 영토비를 건립하자는 건의 사료가 발견됐다.

경상북도는 경북도 독도사료연구회에서 2019년 연구회 과제 수행 중에 정조 연간에 예조 정랑(정5품의 실무관리)이었던 이복휴가 독도에 영토비를 세우자고 건의한 기사를 찾아냈다고 10일 밝혔다.

이번에 새로이 발굴한 사료는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정조 17년(1793년) 10월 1일자 기사다. 기사에는 우산도를 ‘울릉외도(蔚陵外島)’라 칭했으며, 이복휴가 우산도에 영토비를 세워 우리 땅임을 증명하자고 건의 한 것이다.

이복휴의 건의 내용은 “신이 본조(예조)의 등록을 살펴보니, 울릉외도는 그 이름이 松島로, 바로 옛날의 우산국입니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나무사자로 섬사람들을 겁주어 항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만일 송도에 비를 세워 이사부의 옛 자취를 기술한다면 그 섬이 우리나라 땅 임을 증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회 소속 유미림 박사(한아문화연구소장)는 이복휴가 말한 ‘울릉외도’는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먼저 여기에 보이는 우산국은 ‘동국문헌비고’(1770)에서 울릉도와 우산도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마쓰시마(松島)는 당시 일본인들이 우산도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며, ‘울릉외도’가 바로 ‘松島’라고 했으므로 ‘울릉외도=松島=우산도’라는 공식이 성립한다고 말했다.

‘울릉외도’는 이복휴에 와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가 ‘울릉외도’라고 칭한 이유는 ‘우산도’보다 울릉도의 속도임을 잘 드러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영토비 건립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수토제가 정착돼 울릉도 및 속도에 대한 영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인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유 박사는 본 사료의 의의에 대해 첫째, ‘울릉외도’라 칭하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도서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둘째,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예상하고 그 대응책을 강구하려 했다는 것이며 셋째, 조선의 관료가 영유권 확립을 구상한 것은 조선 정부가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례”라고 말했다.

한편, 경상북도 독도사료연구회는 지난 2010년에 발족해 2018년까지 9년간 일본사료 21편을 번역·출판했고, 금년부터 국내사료 번역을 시작했다.

2019년도 연구과제는 관찬사료 4종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에서 울릉도·독도 기사를 발췌 번역하는 것이며, 이를 정리해 연말에 경북도로 제출할 예정이다.

서장환 경북도 독도정책과장은 “이번 사료는 조선의 왕(정조)과 관료가 우산 즉 독도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로써 최근 이영훈 교수가 조선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내용을 전면 반박할 수 있게 됐다”며 “경북도는 앞으로도 독도사료연구회가 국내 사료 발굴과 연구 성과를 집적하고, 사료 분석을 통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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