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서 77년 피눈물 덕혜옹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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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10-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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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순종 유릉과 대한제국 황실의 묘역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조선의 마지막, 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년생 · 재위 1907~1910년)이 1926년 4월 25일 새벽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52세였다. 순종은 자녀가 없었다. 절손(絶孫)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은 이듬해인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게 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고,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1907년이면 이미 조선의 국운이 다 기운 상태.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고 어찌 보면 순종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위 후 불과 3년 만에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다.

"병합은 내가 한게 아니다" 순종의 유언

순종은 마지막 순간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일명(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 모두 나를 유폐하고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고금에 어찌 이언 도리가 있으리오. 짐이 구차하게 산 지 17년이라. 종사(종묘사직)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라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님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되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대한제국 황제의 정장을 입은 순종

1910년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황제의 유언은 처연하다. 한편으로 현실적인 무력감이 전해오기도 한다. 순종의 유언은 9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6월10일 장례행렬 따라 터진 외침 "대한독립 만세"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발인 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오전 8시 30분경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가로변 군중 사이에서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학생 300여명의 외침이었다. 관수교에서, 을지로에서, 훈련원에서, 흥인지문(동대문)에서, 동묘(東廟)에서, 신설동에서···. 장례 행렬을 따라 학생들의 외침이 계속 이어졌다. 순종의 유언이 이심전심(以心傳心) 통했던 것일까. 순종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6·10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의 인산(因山 · 황제의 장례)일에 일어났다. 


다음날인 6월 11일 순종은 남양주 금곡의 유릉(裕陵)에 묻혔다. 아버지인 고종의 홍릉(洪陵) 바로 옆이다. 유릉엔 정후(正后)인 순명황후 민씨가 며칠 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명황후 민씨는 1904년 승하해 지금의 서울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묻혔다. 당시에 순종은 황태자였고 순명황후도 황태자비였다. 따라서 순명황후의 무덤을 유강원(裕康園)이라 이름 붙였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등극하자 황후로 추존되고 유강원에서 유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남양주 홍릉 아버지 옆으로 장지가 결정되었다. 6월 5일 순명황후가 먼저 천릉되었고 6월 11일 순종이 이어 묻힌 것이다. 능호를 별도로 정하지 않고 황후의 능호를 그대로 따랐다. 순종의 계후(繼后)인 순정황후 윤씨는 1966년 72세로 승하해 이곳에 함께 묻혔다. 유릉은 특이하게도 동봉삼실(同封三室), 즉 3인 합장릉이다. 이런 경우는 조선 왕릉 가운데 유릉이 유일하다.
 

유릉은 순종황제와 첫번 째 황후 순명황후 민씨, 두번째 황후 순정황후 윤씨 3인의 합장릉이다. 능 아래로 일자 모양의 침전(寢殿)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이다. 기본적으로 조선 왕릉의 법식을 계승하되 명나라의 황제릉의 특징을 가미했다. 그러다 보니 홍릉과 전체적인 배치나 구조에서 비슷하다. 유릉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석물이다. 홍살문과 침전 사이의 참도(參道)에 좌우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석물을 배치했다. 홍릉과 비슷한 듯하지만, 눈여겨보면 홍릉의 석물과 차이가 있다. 우선 동물 조각상인 석수(石獸)들의 다리 사이가 홍릉은 막혀 있지만 유릉은 뚫려 있다. 그리고 유릉의 석물이 홍릉에 비해 더욱 사실적이다. 석물 제작에 근대적인 조각기법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유릉의 조성과 석물 제작은 일제가 주도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조각가 아이바 히코지로(相羽彦次郞)가 제작한 모형을 토대로 유릉의 석물을 만들었다. 그 모형은 서양식 조각 수법에 따른 것이다. 서양의 조각기법을 받아들였기에 우리의 전통 조각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방식을 무시한 것이다.

유릉에는 우리의 토종 동물이 아닌 코키리 낙타가 석수(石獸)로 등장한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그렇기에 문석인, 무석인의 얼굴을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체적이다. “얼굴의 표현에서 해부학적인 골격이 강조되어 서양의 석고조각을 연상시킬 정도”라고 평가받는다. 한국인 얼굴이라기보다 다소 서양인 얼굴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얼굴 표현과 달리 인체의 비례는 사실적이지 않다.
일제는 유릉을 조성한 뒤인 1927년에 침전 앞 석물을 만들기 시작해 1928년 마무리했다. 일제는 “조선의 예술품은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그 시대의 예술작품을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조선의 전통 문화와 미술을 폄하하려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유릉의 석물에는 이렇게 일제의 침략 의도가 짙게 담겼다. 누군가는 “문석인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무석인의 얼굴은 겁에 질린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제는 조선의, 대한제국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망국의 무능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서양식 조각 기법으로 제작된 유릉의 무석인.[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유릉 옆은 홍릉이다. 홍릉의 침전 옆으로 난 길로 돌아나가면 고즈넉한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죽 따라가면 대한제국 황족들의 무덤이 나온다.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英親王·1897~1970) 부부가 묻혀 있는 영원(英園)이 있다. 영친왕은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원 바로 옆에는 영친왕의 둘째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었던 이구(李玖·1931~2005)의 무덤 회인원(懷仁園)이 있다. 그 옆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의친왕(義親王·1877~1955) 묘와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묘가 나온다. 영친왕과 의친왕은 순종과 이복형제인 셈이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는 모두 순종과 이복 남매다.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들이 대부분 남양주 홍릉과 유릉의 능역(陵域)에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옛 무덤은 그 격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능(陵)은 보통 왕과 왕비의 무덤에 붙이는 이름이다. 원(園)은 세자와 세자빈에 붙인다.

타국서 수모·병마 시달리던 몰락한 제국 황손들

몰락한 왕조의 후예들이었기에 이들의 삶은 기구할 수밖에 없었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그 해 12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야 했다. 일제는 조선 왕족을 일본으로 흡수하기로 하고 1920년 영친왕을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와 정략결혼시켰다. 사실상 인질이 된 것이다. 1926년 순종의 승하 이후 명목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렸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한국의 광복으로 영친왕 부부는 일본 왕족의 자격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광복 후 귀국을 원했지만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왕실의 부활 여론을 우려해 그를 거부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외면당한 영친왕. 1963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그의 삶은 회복불능으로 망가져 있었다.
 

                 고종황제를 딸바보로 만든 덕혜옹주의 모습


고종이 나이 예순에 얻은 딸 덕혜옹주. 그 또한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고 그곳에서 정략결혼을 해야 했으며 조선을 그리워하다 끝내 조현병과 실어증으로 고통받았다. 1962년에서야 조국에 돌아왔으나 그의 삶은 이미 망가졌고 끝내 1989년 창덕궁에서 77세로 삶을 마쳤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는 2005년 7월 일본 도쿄 도심의 한 호텔에서 타계했다. 그런데 그의 타계 소식이 서울에 전해진 것은 이틀 뒤였다.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당시 부음을 가장 먼저 접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한 관계자는 “일흔이 넘은 황세손이 호텔에서 객사한 채 발견됐다는 것이 놀랍고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태자였고, 황세손이었고, 옹주였지만 모두 몰락한 제국의 황손일 따름이었다. 일본에서 인질로 살았고, 숱한 수모와 번민 속에서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고 저항도 해보았지만, 사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나 세상을 떠나 남양주 금곡동에서 다시 만났다. 흥릉이나 유릉보다 오히려 영원, 회인원, 덕혜옹주묘, 의친왕묘의 묘역에서 더 숙연해진다. 

이복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황실 능역에 함께 묻혀 

2016년 영화‘덕혜옹주’가 개봉한 바 있다. 궁궐에서 마냥 예쁘게 뛰어 다니고 아버지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던 어린 소녀의 모습도 눈에 선하고, 조현병과 실어증에 걸린 덕혜옹주의 처참한 모습도 여전히 눈에 생생하다. 그 엄청난 간극에 관객들은 대부분 눈물을 훔쳤다. 영화‘덕혜옹주’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덕혜옹주를 아십니까?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아십니까?”이 모든 사건들이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우리의 역사다.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남양주 홍릉 유릉과 주변 능역을 찾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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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2. <대한제국 황제릉>, 김이순, 소와당
3.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이태진,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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