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2-3]일제의 왜곡보다 심한 자기 역사 왜곡의 꽃-무궁화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9-04-02 08: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약 337만 자의 『고려사』에 무궁화는 단 한 자도 없다.

  • 한국 5대 사서엔 없는 무궁화···일본 5대 正史엔 수두룩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글자수 약 337만 자의 『고려사』에 무궁화는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4965여만자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단명의 의미로 단 한 번 나온다. 고려와 조선의 시공에는 매화·연꽃·모란·동백·진달래·살구꽃·배꽃 등등 온갖 꽃들이 만발했는데 무궁화만 피지 않았다. 이래도 무궁화가 한민족 고유의 국화(國花)인가?

◆약 337만 자의 『고려사』에 무궁화는 단 한 자도 없다.

“무궁화는 고려시대에는 전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적·의학적으로 진중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자 평생에 이처럼 생뚱맞은 글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사전’도 아니고 ‘대백과사전’ 속에서. 무궁화가 고려 시대에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다니? 그런 흔적은커녕 무궁화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궁화는 고려속요에도 경기체가에도 없다. 고려 태조에서부터 충렬왕 때까지를 기록한 『제왕운기』 ‘본조군왕세계연대’의 오언시 700수에도 없다. 그런데 교육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이자 한국문화 연구와 교육의 총본산,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그 대표적 콘텐츠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근거는 도대체 뭘까?

그리하여 필자는 고려 역사의 양대 권위서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무궁화’를 검색해봤다. 무궁화는 물론 무궁화의 유사어, 무궁화와 관련된 모든 사물과 사건은 단 한 자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총 139권 75책, 글자 수 336만9623자의 방대하고 세세한 기록으로 유명한 『고려사』(1)*에 무궁화는 단 한 송이 꽃도 피지 않았다.(2)* 연꽃, 매화, 모란, 동백, 진달래, 배꽃, 장미, 해바라기, 오얏꽃, 살구꽃 등등 백화(百花)는 만발했는데.

역사서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고려청자, 송 나라로 수출됐을 정도로 각광을 받은 나전칠기 (『고려도경』(高麗圖經) 참조)를 비롯 미술·음악·건축·공예·의상·생활용품·문양 등 고려시대 문화재와 유물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무궁화는 어디로 다 갔을까? 무궁화가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이처럼 지금의 코리아(Korea) 대한민국 국화(격)인 '무궁화'는 과거의 코리아, 고려의 시공에서는 존재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고려시대’는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고 ‘전국민’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전국민인가?

◆한국 5대 사서엔 없는 무궁화···일본 5대 正史엔 수두룩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집히는 데가 있어 필자는 이웃 나라 일본 사서들을 들여다봤다.

‘무궁화’는 일본의 6대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続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 『문덕천황실록』(文徳天皇実録), 『일본삼대시록』(日本三代実録)중 맨 앞의 『일본서기』만 제외한 5대 정사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799년에 천축(인도)사람이 무궁화 씨앗을 가져야 미가와(三河) 지방, 지금의 아이치현(愛知県)에 심었다는 『속일본기』에서부터 일본의 사서들은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려전기에 해당하는 헤이안(平安·794~1192) 시대와 가마쿠라(鎌倉·1192~1333) 시대에 무궁화가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말과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무로마치(室町·1333~1573) 시대에 이르러 일본 각지인의 애호를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중·근세 문헌은 무궁화가 우리나라 조선 중기 이후에 해당하는 에도(江戸·1600~1868)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본 각지에 널리 재배되어 주요 농작물의 하나로 되었다고 추가 확인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각종 문헌들은 일본 각지의 퇴적물에 쌓인 무궁화 꽃가루를 에도시대부터 일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재배된 사실을 증빙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대 5대 사서에는 꽃 한 송이, 꽃잎 하나도 나오지 않는 무궁화가 일본의 5대 정사를 비롯 일본 중세, 근·현세 문헌에 도처에 만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민족대백과사전』의 ‘무궁화’ 대목은 ‘고려시대 전국민’으로 쓰고 ‘가마쿠라와 무로마치시대 일본국민’으로 읽어야 하는 건가? 과거 일제의 역사 왜곡보다 훨씬 심한 오늘날 한국 지식계의 자기 역사 왜곡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4965만여자의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글자 나오는 단명의 상징 무궁화

"평안도 평양에 무지개가 뜨고 살구꽃이 만발하여 열매가 맺혔다. 황해도 해주에서 진달래꽃·장미꽃·배꽃이 만발했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년) 10월 13일

"전라도 영암땅에서 가을갈이를 한 보리가 이삭이 패어서 익고 진달래·복숭아·살구가 곳곳에서 꽃이 피었는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현종실록 25권, 현종 12년 (1671년) 12월 11일

무궁화가 오래 전부터 우리 겨레의 마음속 꽃이었다면 위 『조선왕조실록』에 예시한 글에 진달래꽃 살구꽃 복숭아꽃 장미꽃 배꽃 대신에 무궁화가 만발해야 하지 않았을까?

방대하면서도 꼼꼼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4965만여자의 『조선왕조실록』(3)*에 ‘무궁화’는 단 한 글자 나온다. 로또 1등 당첨될 확률, 814만5060분의 1의 여섯 배나 낮은 확률이다. 그마저 행운이 아니라 ‘조근’(朝槿), 단명의 상징으로 나온다(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505년 10월 18일 5번째 기사)(4)*.

이러한 ‘희한한 사실(史實)’에 국내 텍스트들은 아래와 같이 ‘희한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왕실화가 ‘배꽃[花]’으로 정해져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던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왕실화로 된 오얏꽃을 숭상하고 무궁화꽃을 소홀히 했던 것”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3』

과연 그럴까?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 앞의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오얏꽃(李花)'을 ‘배꽃(梨花)'으로, ‘한민족’을 ‘조선민족’으로 오기하고 있다. 전자의 오기는 무지의 소산이라기보다 의도적 오기에 가깝고, 후자의 오기는 의도적 모욕 또는 일본 우익의 뇌로 쓴 글이라고 분석된다. 한국 최고 문화학술연구 엘리트집단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조선의 왕실나무(?)가 ‘오얏리(李)’인 줄 몰랐을 리 없고, ‘조선민족’이 일제강점기와 현대일본 우익이 우리 ‘한민족’을 폄하 지칭하는 용어라는 걸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실화’ 오얏꽃 때문에 한국에서 무궁화가 사라졌다고?

‘사실(史實)이자 사실(事實)’은 이렇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애당초 왕실화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초대 태조실록과 25대 철종실록까지 오얏꽃 즉 ‘이화’(李花)가 왕실화라는 기록은 단 한 구절도 없다.  아예 ‘李花’라는 단어 자체가 조선 태조 개국 1392년부터 18대 헌종 15년까지 1674년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5)*

헌종실록과 영조실록에 ‘李花’라는 사람 이름이 각 1회씩 2회 나온다. ‘李花’가 꽃 이름으로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것은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6월 22일 양력 2번째 기사다.

고종황제는 광무 3년 1899.6.22.에 <원수부 규칙> 1편을 반포한다.  제3부 제4조는 “식대(飾帶)는 장관은 황색에 은사로 이화(李花)를 가식(加飾)하고 영위관(領尉官)은 황색만 쓴다.”고 돼있다.

이듬해 광무 4년 1900년 4월 17일 대한 〈훈장 조례〉 제2장 제1조 훈장 및 명목 서훈 제1조에 1. 이화 대훈장(李花大勳章)을 훈장으로 규정했다.

오얏꽃은 조선의 왕실화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황실화다. 오얏꽃이 대한제국 황실화라면 몰라도 조선왕실화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고종황제는 욱일기 모양의 꽃술 무늬 무궁화를 한국에 침투시키려는 일제와 종일매국노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오얏꽃을 훈장 등으로 활용한 것이다.  요컨대 ‘조선왕실화’ 오얏꽃 때문에 무궁화가 사라진 게 아니다. 욱일기를 단 일본함대가 청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1894년 이전 한반도에서 무궁화의 존재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양화수록』(6)* 원본에 없던 무궁화가 300여년후 가필된 사연은?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저술한 한국 최고의 화목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檀君)이 개국할 때 무궁화『木槿花』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무궁화의 나라(槿域)’라 말하였으니,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봄을 장식하였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라는 기록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갈수록 태산이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 구절은 한 마디로 ‘무중생유’(無中生有)다. 좋게 말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위조와 변조를 넘어선 날조(捏造)다. 중립적으로 말해도 허실을 뒤섞어 독자를 혼란시키는 글이다.

한국사상 최초의 화훼전문서 『양화소록』은 세종의 조선 시서화의 3절로 불리는 강희안(姜希顔, 1419~1464)이 1474년 출간한 책이다. 강희안은 “모든 꽃은 다 아름답다” 는 듯 모든 화목들을 차별없이 애호했다. 소나무, 향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 난혜, 서향화, 연꽃, 석류꽃, 치자꽃, 사계화, 산다화, 자미화, 왜철쭉, 귤나무 등 16종의 화목의 특성과 재배법을 정성스레 소개했다. 그런데 『양화소록』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무궁화는 단 한 글자도 없다.

그로부터 300여년 후 황해도 배천 사람 유박(柳璞, 1730~1787)이 꽃의 등급을 구분한 책 『화암수록(花庵隨錄)』(출간연도 미상)을 펴냈다. 『화암수록』은 저자 자신이 화원을 경영하면서 얻은 꽃에 대한 지식에다가 기존의 문헌들을 참조하여 펴낸 책이다.

그런데 『화암수록』에 맥락 없이 『양화소록』이 나오고 강희안이 마치 꽃들을 9등급으로 차등대우한 것처럼 가필된 ‘화목구품(花木九品)’이 수록돼있다. 거기에 강희안이 언급조차 않았던 ‘무궁화’가 최하위 9품에서도 최말단으로 달려 있고, 다시 이와 별도로 유박의 이름으로 분류된 ‘화목구등품제’에는 8품으로 올려져 있다.(7)*

그리고 말미에 출처와 근거가 막연한 토가 하나 달려 있다.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槿域)이라 불렀다 한다. ······ 속명 무궁화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뜬금없는 토 하나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저자나 책의 내용이나, 신뢰성이나 영향력 면에서나 『양화소록』에 비교할 수도 없이 미미했던 『화암수록』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원예서적으로 뜨게 만들었다. 바로 이 맥락 없는 토 하나가 위에 예시한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것처럼 변조되어 오늘날 한국의 온갖 온·오프라인에 사실처럼 유포되고 진실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어사화가 무궁화라고?

국내의 기존 무궁화 관련 자료에는 “장원급제자의 모자에 꽂는 꽃이 무궁화라고 『조선왕조실록』에 있다”고 적혀있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전수분석 해보았으나 그런 대목은 흔적도 없다. 실록의 원문을 조작할 수 없으니 어사화(御賜花)를 무궁화라고 날조한 주석을 ‘중종실록’(중종 23년 10월 14일 임자 5번째기사)에 달아놓았다.

어사화는 생화가 아니라 종이꽃이다. 대오리를 2개조(組)로 하여 맨 아래에는 커다란 종이를 꽂고 위에는 청·황·홍색의 종이를 여러 개 붙여 만든 지화(紙花)다(『용재총화慵齋叢話』 참조). 이런 종이꽃 어사화의 모습은 무궁화가 전혀 아닌, 개나리와 비슷한 영춘화(迎春化)다.

◆◇◆◇◆◇◆◇주석

(1)*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은 각각 국보 322호, 국보 306호, 국보151호 인데 『제왕운기』는 보물 418호, 『고려사』는 국보도 보물도 아닌,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 『고려사』와 『제왕운기』를 국보로 승격시키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찬란하고 당당한 KOREA 자주독립이 민족대서사시「고려사」만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지 않고 지방 유형문화재로 처박아 두고 있는 건
자기 역사 모독이자 조상에 대한 패륜 악행이다. 「고려사」의 국보 지정 시급하다.

(2)*『고려사』 53권 7지(志) 오행(五行) 꽃(花) 경종 5년(980) 12월 진달래꽃 杜鵑花이 피었다.. 현종 2년(1011) 11월 전주(全州) 흑석사(黑石寺)에서 모란이 피었는데, 눈이 덮여도 꽃이 지지 않았다..현종 18년(1027) 8월 광명사(廣明寺)에 모란이 다시 피었다..인종 11년(1133) 8월 배꽃이 다시 피었다..의종 5년(1151) 8월 궁궐 남쪽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의종 21년(1167) 8월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고종 44년(1257) 9월 갑인 사관(史館)에 장미꽃이 피었다..고종 45년(1258) 10월 사관(史館)에 장미꽃이 피었다..원종 원년(1160) 8월 배꽃이 피었다..
충혜왕 원년(1331) 10월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었다..충정왕 3년(1351) 10월 해바라기와 장미꽃이 피었다..
우왕 5년(1379) 10월 배꽃이 피었다..우왕 8년(1382) 7월 궁궐에 배꽃이 피었다.

(3)*유네스코는 1997년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방대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라고 높이 평가한바 있다.

(4)*무궁화가 336만 9,623자「고려사]에 한글자만 나왔더라면 , 4,965만여 자의 [조선왕조실록]에 단명요절 아닌 무병장수의 상징으로 단 한번이라도 나왔더라면, 필자는 무궁화 보급과 선양의 최선봉에 섰을 것이다.

(5)*『조선왕조실록』에 총 42회 나오는 오얏꽃(李花)중 고종 이전의 2회는 인명, 황실화로서 오얏꽃은 고종실록에 20회, 순종실록18회 순종실록부록 2회 모두 40회다.

(6)*강희안 저, 서윤희·이경록 옮김 『養花小錄 -선비화가의 꽃 기르는 마음』- 눌와, 1999 ; 姜世求. 『姜希顔의 「養花小錄에 관한 一考察」 『韓國史硏究』 60 한국사연구회 1988-03 참조

(7)*1품 매화, 연꽃, 국화, 대나무 2품 모란, 3품 사계화, 월계화, 왜철쭉, 영산홍, 4품 작약, 서향화, 5품 치자꽃, 해당화, 장미, 홍도화, 삼색도, 하얀 진달래, 파초, 금잔화 6품 백일홍, 홍철쭉, 분홍진달래 7품 배꽃, 살구꽃, 보장화, 정향나무, 목련 8품 촉규화, 산단화, 옥매, 출장화, 백유화 9품: 옥잠화, 불등화, 연등화, 연교화, 초국화, 석죽화, 앵속각, 봉선화, 계관화, 무궁화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