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이미 은둔한지 오래거늘 다시 무엇을 구하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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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19-03-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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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부음을 받고서 급한 마음으로 그가 머물던 자리로 달려갔다. 노제를 마친 후 글벗들과 함께 암자주변을 둘러보았다. 눈길이 멈춘 곳은 본채 가운데 방 양쪽에 걸린 주련(柱聯·기둥에 장식삼아 세로로 걸어놓은 글)이다. 붓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탁본액자다. 원본은 임진란의 구국영웅인 사명대사(1544~1610) 열반지인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있다고 한다. 글씨는 만파의준(萬波誼俊) 스님이 썼다. 하지만 만파의 행적은 묘연하다. 1860년 무렵 활동한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이 그 솜씨를 칭찬했다는 전설만 남아있다. 글씨 외는 별다른 흔적이 없는 까닭에 그 글씨는 인물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신비감이 한겹 더해진다.

은거부하구(隱居復何求) 무언도심장(無言道心長)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말없는 가운데 도심이 자라네.

봄이 오는 길목에서 60대 중반 나이에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난 법장 스님(1954~2019)은 1990년 무렵 합천 해인사 도서관장으로 부임했다. 그 후 가야산에서 몇 년간 머물렀다. 그때 만파글씨를 만났다고 한다. 번거로운 단체생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늘 은둔을 꿈꾸었다. 그런 당신에게 꾸밈없는 소박한 글씨체와 무욕(無欲)을 추구한 내용이 함께 겹쳐지며 두 배의 울림으로 닿아왔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 글씨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많은 발품 손품 끝에 귀한 작품을 얻었지만 걸어둘 만한 기둥이 없었다. 드디어 이 암자에 은둔하면서 글씨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동시에 왼쪽 서재 방문 위에 ‘정와(靜窩·고요한 작은 움집)’라는 이광사(李匡師1705~1777) 글씨 모작까지 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은둔자임을 두 배로 강조했다.

은거지로 점지한 전남 화순 모후산 골짜기는 앞뒤는 물론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침해는 늦게 뜨고 저녁해는 일찍 진다. 인근에는 민가도 없다. 십리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진입로는 암자가 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좁고 꼬불꼬불한 비포장 길이다. 군데군데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장한 시멘트는 이미 누더기 상태다. 그런 곳이지만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로 불편함마저 즐기면서 도량을 가꾸었다. 밀려오는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그리워할 때도 많았다. 그런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을 가감없이 「월간해인」에 ‘토굴일기’라는 이름으로 일년간 연재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매달 한 편 한 편 정성스럽게 읽었다. 전남 영광 출신인 그는 토속어 사랑이 유별났다. 문장 곳곳에서 만나는 남도 사투리는 때로는 읽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타지방 출신들은 문맥 속에서 대충 그 뜻을 짐작하며 읽으라는 식이었다.

‘정와(靜窩)’란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라는 의미의 ‘은구실(隱求室)’과 같은 뜻이다. 은구실의 원래 주인은 송나라 주희 선생(朱熹 1130~1200)이다. 복건성(福建省) 제일의 명승지라는 무이산(武夷山)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무이정사(武夷精舍)’편액을 걸었다. 그 집을 배경으로 ‘잡영(雜詠)’이라는 큰제목 아래 12편 연작시를 남긴다. 정사는 작은 집을 말하며 잡영은 생각나는 대로 읊는다는 뜻이다. 3번째 시의 작은 제목이 ‘은구실’이다. 세 칸 띠집의 왼쪽에 있는 방을 가리킨다. 시 전문은 이러하다. “새벽창에 숲 그림자 열리고(晨窓林影開) 밤중 베개머리에는 샘물소리 울리네(夜枕山泉響).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말없는 가운데 도심(道心)이 자라네.”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주자(朱子 주희)는 화두선(話頭禪)을 완성한 대혜종고 선사(大慧宗杲1089~1163) 어록을 (흠을 잡기 위해) 자주 읽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도리어 대혜어록의 편집자인 동시에 수제자인 도겸개선 스님(道謙開善)과 교류로 이어졌다. 이런 연유로 그의 글에는 알게 모르게 선(禪)적인 느낌들이 배어있다. 그래서 훗날 절집에서도 그의 시를 자주 인용하게 된다. 송나라 주자 시가 조선의 만파글씨를 통해 대한민국의 법장토굴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공감’이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묘한 힘이 있다. 주자는 ‘무이정사 잡영’을 지은 이듬해(1184)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발표했다. 아홉골짜기라는 구곡 명칭도 조선땅의 안동 도산구곡(퇴계), 괴산 화양구곡(송시열), 성주 무흘구곡(정구)으로 이어진다. 법장 스님도 모후구곡을 꿈꿨을까?

스님이 은거지에 처음 당도했을 때 맨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계곡에 줄지어 선 감나무였다. 작은 감이 열리는 토종 고욤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감나무 시(柿)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늘 추구하던 고요함을 살릴 수 있다면 더 의미있는 일이겠다. 그래서 시적암(柿寂庵)이라고 작명했다. 하지만 한문 좀 한다는 훈장들에게 시(柿)자와 적(寂)자는 글자조합이 제대로 맞지 않다는 잔소리를 여러번 들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 터의 주인격인 감나무 이미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리만 빌려 ‘시(是)’자로 바꾸었다. ‘감나무가 있는 고요한 암자’에서 그냥 ‘고요한 암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이미 감나무까지 숨어있다.

감나무 행렬이 끝나는 암자입구의 밭두둑에는 화강암 흰빛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새로 만든 부도(浮屠 유골을 모신 탑)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스님의 모친 부도였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이 암자에서 치른 어머니49재에 참석한 기억까지 떠오른다. ‘온 생을 일곱남매에게 오롯하게 바치셨던 위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워 하며’라는 내용의 기계글씨체가 뒤쪽에 새겨져 있다. 근조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옆자리에는 아랫동네의 거사님들이 땅을 파고 있다. 이 자리에 당신의 부도를 세워달라고 지나가는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 농담은 이제 진담이 되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은둔지에서 20여년을 살아온 이력 때문에 몇 명 되지도 않는 문상객의 조촐한 마중을 받으며 화장을 마친 유골이 돌아왔다. 이렇게 모자(母子)의 인연은 또 이어진다.

이른 봄날의 하루 해는 기울었고 돌아갈 길은 멀기만 하다. 서둘러 암자를 떠나며 남은 이에게 “유품을 정리하다가 혹시 저서가 나오거든 한 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법장 스님의 유일한 저서인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2003)가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발문을 필자가 직접 쓴 책인 까닭이다. 며칠 후 서가에서 그 책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사람은 가도 책은 남는 법이다. 책도 그렇게 그렇게 이어진다.



* ‘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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