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 서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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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혜 기자
입력 2019-01-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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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 법부대신 시절(1904).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양인(良人) 첩의 자식인 서자녀(庶子女)와 천인(賤人) 첩의 자식인 얼자녀(孼子女)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조선은 왕조 개창 직후부터 서얼 차별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태종 15년(1415) “서얼에게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최초의 규정이 나왔고(서얼금고법), 성종 16년(1485)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서얼 신분의 적용은 자자손손에 이르고”,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 비록 부계 및 모계 신분에 따라 상한선을 두어 관직 진출의 길을 일부 열어놓기는 했지만(한품서용조), 서얼 차별의 풍습은 순식간에 뿌리를 내렸고, 그들은 상속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서얼 차별은 노비제도와 함께 동시대에서는 조선에만 있던 악법․악습이었다. 이 두 제도는 서로 얽히며 악무한적 상승작용을 일으켰는데, 특히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제도)은 다수의 양인 여식을 천민으로 전락시켜 축첩을 확산시키는 저수지 노릇을 했다. 고관의 자식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중기의 문신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이 남긴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노비 출신 첩에서 얻은 딸을 면천(免賤)시키기 위해 고심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서얼 차별을 혁파하기 위한 노력은 조선 중기부터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왕조 500년 내내 우리 사회를 괴롭혔다. 이와 관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서얼 차별이 지속된 배경을 “유교경전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서얼차대가 강력히 실시된 것은 양반의 적손들이 관직을 독점하기 위해 서얼을 경쟁에서 처음부터 배제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서얼금고법은 임란과 호란 이후에는 점점 사문화되어 숙종 22년(1696)에 제도상으로는 사라졌고, 정유절목(丁酉節目, 정조1․1777)으로 규장각 검서관 제도를 마련해 관직 등용의 문을 더 넓혔지만, 이는 <경국대전>의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동농 김가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얼 차별의 악습은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으로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100년 넘게 고쳐지지 않았다. 참고로, 동농은 갑오경장의 개혁 실무를 담당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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