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우호인물대상]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주역과 후손 '이소심 이종찬 윤경자 김정육 김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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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선 기자
입력 2019-01-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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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국상-이소심·이종찬, 보국상-윤경자·김정육, 특별상-김선현

[1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한중우호인물대상'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열 왼쪽부터 김용만 김구선생 가족, 이소심 여사 아들 魏伟(웨이웨이)씨, 윤경자 여사 장남 정철승 변호사, 이소심 여사, 정세균 전 국회의장(민주당 의원), 김자동 회장, 이종찬 전 의원, 윤봉길 선생 후손인 윤주씨, 김정육씨, 김선현 오토그룹 대표 2열 황호택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 김태영 전국은행연합회장, 이병구 보훈처 차장,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회장,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 김광수 농협금융지주 회장, 지성규 KEB하나은행 부행장, 김재신 전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 3열 이계성 KB국민은행 부행장, 이순우 저축은행중앙회 이사장, 김덕수 여신금융협회장,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 은성수 수출입은행 행장, 조수형 우리은행 부행장, 김창호 IBK 기업은행 부행장, 이재호 동신대학교 교수]


올해 임시정부 출범 100년을 맞아 선정된 한중우호인물대상 수상자는 우리나라와 중국 정치인, 학자, 보훈단체 대표자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관계 부처와 기관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엄정한 심사를 거쳐 결정했다.

시상 대상은 한·중을 무대로 광복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 유공자, 중국 내 임시정부 활동을 도운 중국 인사들과 후손, 독립유공자 발굴과 독립운동 선양사업을 위해 애쓴 개인 또는 단체다. 5명의 수상자들에 대해 살펴본다.

◆ 호국상 수상자 이소심
 

[이소심 여사]

이소심 여사(80)는 이달 선생(1907~1942)의 딸이다. 이달 선생은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한 문학도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요인 암살 등을 도모했다.

1931년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오면직, 이강훈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결사대원이 돼 활동했고 1933년 3월 5일에는 이강훈 등과 일본공사 유길명을 권총과 폭탄으로 주살하려는 계획에 참가했다. 3년 뒤 남경에서는 유자명, 정화암 등과 조선혁명자연맹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1938년 10월에는 중국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입대해 대장 김원봉, 본부 총무반 이집중 등과 함께 본부선전조장이 돼 활동하고 1940년 2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 정치조자료실의 주임과, 부대를 대표하는 중국문 간행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1942년 4월 20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8차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편입한다는 의결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될 때 제1지대 비서로 임명돼 활동했다. 이달 선생은 1942년 중국 사천성 중경시 남안구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이소심 여사는 1945년 1월부터 1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정부 청사가 충칭시 중심가인 위중구 롄화츠에서 1990년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거 작업이 시작되자 당시 백범김구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던 김구 선생 차남 김신 전 공군 참모총장에게 알려 외교부가 대응해 중국 측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재개발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했다.

1992년 수교 직후 재개발 사업이 중단되고 임시정부 청사 복원이 시작되면서 1995년 공식 개관이 이뤄졌다. 당시 이 여사는 충칭시 인민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소심 여사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1961년 의사가 됐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강제 노동 조치를 당했다가 복권돼 충칭시 난안구 제1인민병원장을 역임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충칭시 인민대표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부친을 대신해 훈장을 받기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백범일지를 번역해 출간했다. 2003년에는 공산당을 탈당하고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 호국상 수상자 이종찬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84)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로 우당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우당 선생은 일제 국권침탈에 반대해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로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해 조국광복의 인재를 양성했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인 이회영 선생은 안태국, 이승훈, 김구, 이동녕 등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고 같은 해 여름 이동녕, 주진수 등과 독립기지 건설의 적지를 찾기 위해 만주에 파견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지방을 선정해 개척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910년 봄 이회영 선생은 이시영 등 형제들과 일가를 이끌고 황무지로 망명해 추가장에 정착하고 1912년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1913년 국내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1919년 고종을 해외로 망명시키려 했으나 사망으로 실패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북경으로 망명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이회영 선생은 1930년 4월 국내에서 신현상, 최석영, 차고동 등이 수만원의 운동자금을 마련해 오자, 이 돈을 자금으로 만주에 총력을 집중하고, 상해, 복건, 북경에 연락부를 둘 것을 제안했다.

1931년에는 정해리, 김광주, 원심창, 박기성, 이용준, 유산방 등이 중심이 돼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여 이회영 선생을 의장에 추대해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만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돼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 보국상 수상자 윤경자
 

[대리 수상한 윤경자 여사 장남 정철승 변호사]

윤경자 여사(78)는 윤기섭 선생(1887~1959)의 딸이다. 윤기섭 선생은 1908년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동삼성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을 추진했다. 1912년에는 부민단이 조직되자 가입하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됐다.

1920년 상하이에서는 육군무관학교 교관과, 임시정부군무부, 임시편집위원장, 상해거류민단 본구역의 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듬해 5월에는 중한국민호조사총사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고, 7월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협성회에 가입했으며, 우리말 사용 장려를 위한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같은해 11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청원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1923년 5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상해에서 조직된 협성회 단장으로 단원 150명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듬해 2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됐고, 2년 뒤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선임돼 1935년까지 군무장 등으로 활약했다.

윤기섭 선생은 1927년 3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혁명을 완수한다는 목적하에 한국국민당 조직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2년 4월에는 한국혁명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에 참여했다. 1934년 2월에는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단체의 합류를 추진해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의 당보부책임자로 임명돼 활동했다. 1943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차장에 임명돼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 보국상 수상자 김정육
 

[김정육 선생]

김정육 선생(83)은 김상덕 선생(1891~1956)의 아들이다. 김상덕 선생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원인 김철수, 윤창석 등 11명의 대표들과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일경에 체포돼 같은 해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 7월 15일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4년 뒤 1923년 2월 2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서 개조파에 속해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김상덕 선생은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의 한족노동당에서 중국지역에 거류하는 한인들에 대한 보호를 위해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12월에는 통합단체인 전민족유일당조직책진회측에서 혁신의회를 결성하였을 때 정의부를 탈퇴하고 김동삼 계열에 속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년 뒤인 1933년 2월 10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대회 결정에 따라 신숙과 함께 중국 남경에 파견돼 한중연합군인 ‘한중연합토일군’의 조직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며 대일한중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1935년 7월 5일에는 5당 통합 후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가운데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일제 말기인 1942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돼 이정호, 김약산과 ‘외교대표파견안’을 제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고 미국 소련 영국 등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교적 활동을 추진했다.

김상덕 선생은 이듬해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윤기섭, 조소앙, 신익희 등 15인으로 구성된 선전위원회 위원에 피선돼 활동했고, 1944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및 민족혁명당 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됐다.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위원장도 역임했다.

◆ 특별상 수상자 김선현
 

[김선현 오토그룹 대표]

김선현 대표(60)는 자동차부품 중견기업인 오토 그룹을 통해 잊혀 가는 독립운동 역사를 되살리고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경영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대한민국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청소년을 일깨우고 다양한 문화 활동으로 역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김 대표의 증조부인 김가진(1846~1922)은 일제가 준 작위를 버리고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출범에 기여한 독립운동계의 큰 인물로 꼽힌다. 김선현 대표는 증조부, 조부모, 부친(김자동 선생은 임시정부 백범 김구의 무릎에서 성장한 인물로 '임시정부의 손자'라는 별명을 지녔다) 등 3대 독립운동 가문의 둘째 딸이다.

김 대표의 조모인 정정화 여사(1900~1991)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고 1920년 비밀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연통제가 폐쇄되자 압록강을 건너 밀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정화 여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장강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김구 선생으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32년에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 가흥으로 이동해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이동해 임시정부를 도왔다.

2년 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에 입당해 활동하고,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간부로 활동했으며, 이듬해인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아래 있는 중경 3·1유치원의 교사로 임명돼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중경 임시정부 산하 대한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에 참여해 훈련부장에 선출돼 활동했다. 방송을 통해 국내외에 있는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면서 위문 금품을 거둬 독립군을 위문했다. 전란과 병고로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 위문하고,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 연락해 재미 각계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성원을 끌어내는 데에도 공헌했다.

정정화 여사는 해방 후 귀국했으나 남편 김의한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정정화 여사는 1991년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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