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초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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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0-15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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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35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반응으로서 ‘감각’
나는 오감을 통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지한다. ‘오감’은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유일한 통로다. 나는 외부에서 내 생활을 침범하는 정보들을 거를 수 있는 여과기를 가지고 있냐는 점이다. 만일 내 마음에 이 여과기가 없다면, 용량이 다 찬 컴퓨터처럼, 작동이 느려지고 바이러스가 생겨 급기야는 고장이 나고 말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 집 마당 한가운데 능수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능수벚나무는 한 달 전부터 추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몸집을 간결하게 다듬기 시작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쉴 새 없이 가지에 처량하게 매달린 색 바랜 나뭇잎을 하나둘씩 땅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뜨린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햇빛을 통해 스스로 오그라뜨렸다. 나는 무엇을 통해 낙엽을 관찰하고 있는가? 떨어지는 낙엽이 내 관찰을 유발했는가? 아니면 내 머릿속 무엇인가가 낙엽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이해하도록 작동해서 그런 관찰이 가능해졌는가? 나는 낙엽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가? 아니면 낙엽 추락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하는가?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의 마음을 침착(沈着)하게 만들고 사물을 명료하게 관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요가수트라' I.35에서 소개한다. 그는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관찰하는 자신의 감각을 응시하라고 조언한다. 오감, 즉 후각, 시각, 청각, 미각, 그리고 촉각은 인간이 매 순간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낙엽이 지면에 닿는 정교한 순간을 눈으로 보면서, 그 우아한 착지의 모습을 감상할 수도 있다. 바닷가로 몰려오는 파도는 그 안에 우리를 치유하는 소리, 바닷물의 냄새, 그리고 자연의 웅장함과 내 존재의 덧없음도 알려준다. 현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정교하다. 요가는 단순한 현상을 다양하게, 다양한 현상들을 간단하게 보는 연습이다. 요가는 단순하고 무료한 인생을 정교하고 감동적인 인생으로 보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요가수련자는 감각훈련을 통해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본다. 나의 오감은 다섯 마리의 말과 같다. 나는 전차에 앉아 다섯 마리 말에 연결된 고삐를 쥐고 있다. 나는 이 다섯 마리 말을 조정하는 마음이다. 만일 각각의 말들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나는 목적하는 장소로 갈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하루 종일 오감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에 노출되어 있어 그 정보의 홍수에 빠져버려 헤매고 있는 노예들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오감을 제어할 고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 존재를 어렴풋이 알더라도 사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자극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오감은 지금 당장 나를 자극하는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쾌락은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더 자극적인 쾌락을 유발한다. 만일 우리가 이 오감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 자신은 사라지고, 그 쾌락을 경험한 감각의 충실하면서도 불쌍한 노예가 될 것이다.

명상의 대상으로 ‘감각’
만일 당신이 끊임없이 홈쇼핑채널과 먹방과 레스토랑 검색 혹은 TV, 컴퓨터, 그리고 휴대폰 화면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에 중독되었다면 이 기계들을 잠시 끄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 눈을 감고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응시함으로써 그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장악할 수 있다. 나는 지난 학기 ‘요가수업’을 월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12시까지 학교체육시설(포스코 스포츠센터)에서 진행했다. 명상, 요가수련, '요가수트라' 소개로 구성된 수업이다.

학생들은 30분간 명상을 가장 부담스럽고 어렵게 생각했다. 한 학생이 나에게 “교수님, 내가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죠?”라고 물었다. 나는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아라”라고 대답했다. 생각훈련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함으로써 시작한다. ‘명상’이란 외부의 자극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잡념이 아니다. 생각이란 우선 그런 잡념들의 생성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잡념의 원인을 유추하는 이성이다. 명상은 외부 자극에 대한 나의 감각을 가만히 바라보는 행위다.
 

'성 바울 병원 정원의 가을 낙엽'(1889년 반 고흐 유화, 73.5cm x 60.5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요가수트라' I.35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들에게 오감을 통해 그들을 공격하는 외부의 자극에 뒤늦게 반응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오감을 미리 능동적으로 훈련함으로써 평정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요가수트라' I.35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브샤야바티 바 프라브릿티 루트파나 마나사흐 스티티-니-반디니(viṣayavatī vā pravr̥tti-rutpannā manasaḥ sthiti- ni-bandhinī)"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경험에 대한 높은 차원의 감각훈련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올 수 있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이 무방비 상태로 수많은 정보들의 공격을 받아 지친 상태를 벗어나는 훈련은 무엇인가? 높은 경지의 감각훈련이란, 단순히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단계를 넘어서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는 내적인 과정을 바라보는 행위다.

높은 경지의 감각훈련은 내가 듣는 소리, 내가 보는 이미지, 내가 느끼는 감각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내가 그 자극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는지를 응시하는 훈련이다. 예를 들어 내가 멋진 레스토랑에서 먹고 싶은 요리를 주문한 후 웨이터가 그 요리를 내 식탁 위에 놓는 순간 내 오감은 혼돈에 빠진다. 내 마음속에 깊이 잠자고 있던 ‘식탐(食貪)'이 등장하여 내가 좌정한 주인자리를 빼앗아 앉는다. 나는 그 순간, 식탐의 노예가 되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이다. 내 후각은 갑자기 예민해서 음식의 향기를 만끽하고 내 눈이 밝아져 음식의 색깔에 탐닉한다. 음식이 내 입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입안엔 이미 군침이 돌고 있어, 음식이 들어오길 간절히 기다린다. 식탐은 나의 손을 움직여 음식을 나도 모르게,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양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는다. 요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제어하고 관찰한다.

산스크리트어 ‘브샤야바티(viṣayavatī)'는 이 감각을 지칭하는 용어다. ‘브샤야바티’는 나를 자극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습관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 대상 그 자체의 움직임에 대한 응시다. 요가수련자의 응시대상은 어떤 자극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힘차게(viṣ)' ‘나가는(aya)'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vat)' 자신의 모습이다. 내가 보는 것은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4에서 요가수련자의 응시대상의 한 예로 ‘날숨(프라차르다나)'와 ‘숨의 정지(비다라나)'를 소개하였다.

그는 인생의 생명을 유지하는 들숨과 날숨을 당연한 자연현상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것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수련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런 자신을 관찰하는 높은 차원의 감각을 ‘프라브릿티(pravr̥tti)'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프라브릿티’는 다음 두 단어의 합성어다. ‘프라(pra)'는 ‘특별한, 정교한, 탁월한’이란 의미를 지닌 접두어이며, ‘브리티(vr̥tti)'는 인간이 일상경험을 통해 생기는 ‘생각’들이다.

‘프라브릿티’는 요가수련자가 외부의 자극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참모습을 인식하는 탁월한 생각이다. 요가수련자는 이 훈련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스티티-니-반디니(sthiti-ni-bandhinī)'다. 요가수련자의 마음에서 온갖 잡념들을 제거(ni)하여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한 곳에 묶어(bandhinī) 더 이상 흔들림 없이 가만히 서있게(sthiti) 된다. 그는 자신이 정한 한 점을 향해 의연하게 정진할 뿐이다.

‘또 다른 나’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관찰하고 제어하는 ‘또 다른 나’를 지닌 자다. 그런 나는 나의 행동과 감각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자아다. 나의 행동과 감각은 ‘또 다른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요가는 외부를 향하는 눈을 감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며, ‘또 다른 나’의 탁월한 시선으로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자리를 잡는 수련이다. 나는 지금 외부의 자극에 감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자극에 감각하는 나 자신을 감지하고 있는가? 나는 감각의 노예인가? 혹은 나는 그런 감각을 조절하는 초감각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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