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㉔] "조국아, 왜 이다지도 매정하느냐" 남편 김의한마저 북으로 끌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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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2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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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영원한 이산의 아픔 남기다

[1953년 10월 17일 서울, 6·25전쟁 희생자 추도식에서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AP통신]

수당에게 백범은 민족지도자이기 이전에 다정한 친인이었다. 부엌을 기웃거리며, “나 밥 좀 해줄라우?”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을 건네던 백범. 왜적에게는 아수라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는 천진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쓰러지기 두 주일 전, 백범은 후동이의 중학교 졸업식(그 당시 중학교는 6년제)에 참석해 축사를 해주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백범이 “내 친자식이나 다름없는”이라 말하던 후동이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백범이 쓰러진 뒤, 어둡기만 하던 집안에 경사라면 경사였다. 임정 식구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수당 부부는 감사의 말씀을 들어주셨어야 할 백범이 안 계신 게 또 서러웠다.
세상은 친일파의 것이 되었다. 공무원도, 순사도, 검사도, 판사도, 일제 때 그 얼굴들이었다. 조국의 허리를 가르고 권력을 잡은 이승만은 곧 마각을 드러냈다. 한국독립당에까지 탄압의 마수를 뻗쳤다. 백범 암살로 뿌리가 뽑힌 터에, 공산당원으로 몰려 처벌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정부고관들은 말끝마다 ‘북진통일’이었다. 왜놈이 달아준 계급장을 뽐내던 군인들이 이제는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외친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970년대 정정화 여사.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간 이승만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총선거가 치러졌다. 한국독립당 내부에서는 참여와 불참이 갈렸다. 당론은 불참이었으므로, 조소앙 같은 이는 따로 사회당을 만들었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소앙과 소해 장건상이 최다득표로 당선되고, 조병옥, 윤치영 등 단정에 앞장섰던 이들은 낙선했다. 당시 극심했던 관권부정선거를 감안하면, 실제 표심은 정부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게 틀림없다.
해가 바뀌고, 수당 가족은 돈암동 큰시누이집에서 지금 세종문화회관 뒤인 도렴동으로 이사했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대한민국은 제외된다고 발언(소위 ‘애치슨라인’, 1950.1.12)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그럼에도, 국방장관 신성모는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고”라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6월 25일. 백범과 우사가 그토록 경고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국군은 그간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무너졌고, 이승만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거짓말을 남긴 채 줄행랑을 쳤다. 서울이 함락되던 날, 신문에는 ‘국군 의정부 탈환’이라는 머리기사가 버젓이 실렸다. 정부가 이미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도망친 뒤였다.
이승만의 방송을 철석같이 믿었던 서울시민들은 꼼짝없이 갇혔다. 전쟁 발발 직전, 투차오에 청년광복군으로 머물렀던 박종길이 전방에서 현역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수당 부부에게 피난을 권하려고 쌀 두 가마를 싣고 돈암동 집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이사한 줄 몰랐던 거다.

# “모시러 왔습니다.”
수당 가족이 바깥채에 세들어 살던 도렴동 집 주인은 나름 재력가였던 모양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 집은 여성동맹 차지가 되었다. 하루는 공산당의 외곽청년조직인 민청(민주청년동맹) 소속 젊은이 둘이 성엄을 불러내고는,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었다. 성엄은 종로구인민위원회에 항의했다.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알고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인민위원장 홍상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에는 수당 부부와 가까웠던 이들이 꽤 많았다.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한지성은 안중근의 막내동생 안공근의 사위로, 청년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여기는 중국이 아니다. 이미 전쟁으로 치달은 좌우익의 대립이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역전됐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인천 쪽에서 연일 함포사격의 굉음이 들리던 어느 날,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건장한 청년은 불문곡직 성엄을 불러냈다. “김 선생님, 소앙 선생 댁에서 모임이 있으니 함께 가시죠. 모시러 왔습니다.” 성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이 수당이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얼굴이었다. 성엄은 그렇게 납북되었다. 소앙도, 우천 조완구도, 일파 엄항섭도, 모두 그렇게 끌려갔다.
 

[1951년 서울, 한국전쟁 당시 수당 정정화 선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사부곡(思夫曲)
왜 이다지 험하기만 할까? 왜 이다지 매정하고 야박할까? 나는 그때 비로소 조국에 하소연했다. 잘못이 내게 있다면 나를 처벌하라고.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를 부르라고. 내가 붙들고 있는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벌 주지 말라고.
그러나 조국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36년이 덧없이 흘렀다. 조국은 끝까지 침묵했고, 그 36년의 하루하루는 혹시나 하여 기다리고, 내 분(分)이겠거니 체념하고, 그래도 또 모르지 하며 헛된 기대도 가져보면서 한 땀 한 땀 천 조각을 깁듯이 메워 온 나날이었다.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내가 열한 살 나이에 동갑내기인 성엄에게 시집왔을 때 우리는 이성지합(二姓之合)이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니 하는 지아비 지어미의 사이이기 이전에 서로 입술도 비쭉거리고 혓바닥 놀림도 해대는 소꼽동무였다.
사실 성엄과 나는 40여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아기자기하고 부부간의 애정을 듬뿍 나누어 가지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툰 적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고동락의 40년 세월은 둘 사이를 묶는 어설프고 설익은 애정보다도 더 질긴 끈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이해였고, 포용이었다.
성엄의 본디 성품이 강인하고 몸도 건강한 편이긴 했지만, 그의 아내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연약함도 없지 않았다. 중국에서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었을 때 참기 어려워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나보다도 오히려 성엄 쪽이었고, 집안일에 대해 나보다도 더 각별히 신경을 쓴 것도 성엄이었다.
특히 성엄은 외아들인 자동이(후동은 수당 부부의 아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의 아명)를 무척 아끼고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부담이 더 크리라고 본다. 만약 성엄이, 자동이의 아버지가, 내 남편인 그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나는 이제 구십 수(壽)를 바라보는데….
(본문 중 ‘사부곡’은 수당이 생전에 남긴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장강일기> p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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