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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1] 토르구트는 왜 돌아왔나? ①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8-03-13 08:02수정 : 2018-03-13 08:02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목초지 줄어든 토르구트

[사진 = 뽀뜨르(피터) 대제]

볼가강변으로 옮겨간 토르구트는 어떻게 됐을까? 1,722년 토르구트의 칸 아유기는 러시아의 뾰뜨르(Пётр:Peter)대제와 사라토프에서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후 토르구트는 러시아에 군사력을 제공하는 등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토르구트는 그러면서 오이라트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청나라와 사절을 교환하며 동쪽의 정세를 읽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준가르를 공격하면서 토르구트와 손을 잡고 준가르를 양쪽에서 협공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러시아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러시아의 간섭 속에서 타지로부터 농민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토르구트인들의 유목지가 계속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목지가 줄어들면 가축이 줄어들고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진 = 토르구트 정착지]

그래서 칼미크(토르구트)에서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어부나 농부가 된 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아예 종교까지 티베트 불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게다가 러시아는 칼미크인들을 러시아 법률로 다루면서 소금과 어업권도 장악해 이들을 경제․정치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귀향(歸鄕) 마음먹은 지도부

[사진 = 열하 피서산장(승덕)]

이런 어려운 상황이 칼미크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러시아 땅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1,756년 토르구트의 부장 동도크다시는 청나라에 사절단을 보냈다. 당시 건륭제(乾隆帝)는 열하(熱河)의 피서산장 만수원(萬壽園)에서 이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따뜻하게 환대한 뒤 티베트를 거쳐 돌려보냈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아무르사나를 앞세우고 단행한 준가르에 대한 1차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직후였다. 아마도 이때 청나라와 토르구트 사절단 사이에는 토르구트가 러시아의 영토를 떠나 준가르 지역으로 돌아오는 문제가 논의됐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러시아는 토르구트가 옛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결심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게 된다.

▶기마병 요구로 귀향 결심 굳혀

[사진 = 에까쩨리나 여제]

당시 러시아는 에까쩨리나(Екатерина:Catherine) 2세의 치세였다. 그들 역사가 여걸로 기록하고 있는 여제다. 남편 뾰뜨르 3세(피터 3세)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던 그녀는 농노제를 확대하고 ‘러시아 귀족의 황금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그리고 독일인을 볼가강변으로 이주시키면서 칼미크인들을 물도 없는 황무지로 밀어냈다.
 

[사진 = 러시아-터키 전쟁]

현지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여제(女帝)는 지도만 보고 칼미크인들이 유목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고 단정하고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여기에 오스만 터키(Osman Turkey)와의 전쟁에 무리하게 많은 수의 기마병을 참여시키도록 칼미크에게 요구했다. 때맞춰 준가르가 멸망하고 그 땅이 비어있다는 소식이 볼가강변에 전해졌다. 그 상황에서 토르구트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러시아, 토르구트 이탈 차단 노력
1770년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에 참가한 뒤 카프카즈 전선에서 돌아온 토르구트의 부장 우바시는 몇 명의 지도자들과의 협의 끝에 다음해 초 볼가 지역을 떠나 옛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러시아는 토루구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여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토르구트가 이탈하는 것은 여러 민족이 혼재해 있는 러시아 남부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촉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더욱이 에까쩨리나 2세의 치세동안 60여 개의 농민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내부 정세가 불안했다.

[사진 = 체포된 뿌가쵸프]

러시아 역사에서 대표적인 반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뿌가쵸프(Пугачёв:Pugachyov)의 난도 토르구트가 볼가강을 떠난 다음해 일어나게 된다. 뿌가쵸프의 난과 관련된 얘기는 뿌쉬낀(푸시킨))이 쓴 소설 ‘대위의 딸’에 잘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반란 발발지가 러시아 남부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토르구트의 이탈을 적극 막으려 했다.

그래서 우바시는 떠난다는 계획을 비밀에 붙이고 러시아에게는 카자흐족에 대한 보복에 나선다고 둘러댔다.

▶험난한 귀향 대장정
출발 전날 우바시는 부족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리고 다음날 아침 볼가강 동쪽 연안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1,771년 1월 5일 새벽, 볼가강의 동쪽 연안에는 토르구트인 3만 3천 가구, 17만 명이 모였다. 하지만 볼가강 서쪽에 있던 1만 수천 가구, 6-7만 명은 볼가강을 건너지 못했다.
 

[사진 = 달라이 라마 14세, 칼미크 방문]

그 해 겨울은 비교적 따뜻해서 볼가강이 얼지 않았기 때문에 서쪽에 있던 이들은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이다. 그 때 합류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남아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이 ‘남아있는 사람들’, 바로 지금 러시아에 있는 칼미크인들이다. 우바시는 17만 명의 부족민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대장정에 나섰다.

그들의 선조 코 오르로크가 토르구트인들을 이끌고 볼가강변으로 이동해온 지 140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선조들이 볼가강변으로 이동해올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험난한 길이었다.

▶귀향길에 희생된 10만 명

[사진 = 카자흐인 사냥꾼]

그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보고 받은 에까쩨리나 2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그들의 귀향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지시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우바시 일행은 우랄강에 도착해 러시아 군영을 습격한 뒤 강을 무사히 건넜다. 이제 엠바강을 건너면 카자흐 초원을 거치는 여정에 접어들게 돼 있었다.
 

[사진 = 겨울의 카자흐]

하지만 겨울 추위가 매서워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시 여정을 시작할 때까지 우랄강과 엠바강 사이에 머무는 동안 동사(凍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4월 들어 일행은 다시 동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넓은 카자흐 초원을 횡단하는 일행을 카자흐인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사진 = 토르구트의 탈출]

이미 카자흐는 러시아로부터 그들을 저지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놓고 있었다. 카자흐인들이 그들을 공격했고 그 결과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추위와 긴 여정으로 지친 데다 가족까지 대동한 그들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사진 = 일리 시가지]

어렵게 카자흐와 키르키즈 등의 추격과 공격을 피해가면서 토르구트는 볼가강을 떠난 지 7개월 만에 목적지인 일리의 고향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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