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⑦] 전란의 상처에서 핀 사랑…중국식 멜로의 ‘봄’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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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2018-01-0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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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일본 등 각축 벌이던 시대…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 다뤄

  • 페이무 감독의 멜로 연출 돋보여…2005년 '최고의 중국영화'로 선정

중국 영화 '작은 마을의 봄'의 포스터.[사진 출처=바이두]

1940년대 중국은 동란의 시절이었다. 8년 동안 이어진 중일전쟁이 끝나자 국공내전이 닥쳐왔다. 온 나라가 신음했고 도시와 마을은 무너져 폐허가 됐다. 그러나 어김없이 봄은 또 찾아왔다. 남쪽의 어느 작은 마을, 봄과 더불어 반가운 손님도 찾아왔다. 영화 ‘작은 마을의 봄(小城之春)’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란의 상처로 곳곳이 무너진 마을. 향신(鄕紳, 명청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고 향촌에 살던 사람)이었던 다이리옌(戴禮言)과 부인 저우위원(周玉紋), 다이리옌의 여동생 다이슈(戴秀)가 함께 살고 있다.

몰락한 봉건 왕조를 상징하듯 리옌은 오랜 병고에 시달려 기력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지낸다. 위원은 말없이 조용한 성격으로 남편을 보살피고, 꿈 많은 소녀 다이슈는 명랑하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병을 앓는 남편을 수발하는 위원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하다. 영화는 고독한 여인의 무미건조한 삶을 독백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침대 맡 추렴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내뱉는 마음속 고백은 가련한 여인의 삶을 극대화한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중, 문득 찾아온 손님은 바로 리옌의 친구 장즈천(章志忱)이었다. 젊고 잘생긴 의사인 즈천은 리옌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으나 위원의 옛 사랑이기도 했다. 위원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은 여러 해가 지나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공산당과 국민당, 일본 등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인물들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려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민’(위원)을 괴롭히는 낡은 세력인 일본(리옌)과 그 병증을 고치려 하면서도 ‘인민’을 유혹하는 국민당(즈천), 그리고 새로운 희망인 공산당(다이슈)이라는 구도로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이어질수록 그런 해석보다는 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알레고리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야기 속 인물 관계가 현실 상황과 모두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이슈는 즈천에 대해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지만,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해석이 된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리옌 몰래 서로 만남을 거듭하는 위원과 즈천의 행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밤늦게 위원의 방에 찾아들어와 촛불을 끄며 속삭이듯 안부를 묻는 즈천과 당황하면서도 즈천을 맞아들이는 위원을 보고 있는 장면에선 가슴을 졸이게 된다. 남편과 남편의 친구, 시누이 사이에 얽히고설킨 사각관계의 애정이 펼쳐진다.

네 사람은 함께 산책도 하고 뱃놀이도 하면서 정겨운 시간을 보내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긴장의 끈은 더욱 팽팽해진다.

욕망을 이루지 못한 남녀의 눈빛은 당돌하면서도 무거운 죄의식을 공유한다. 적잖은 영화가 그렇듯 팽팽하게 이어진 끈은 반드시 끊어지는 순간을 맞고야 만다. 다이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저녁, 위원과 즈천은 모두 거나하게 취하고 만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리옌은 아내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짐을 지운 자신을 자책한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고 깊이 잠든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긴장을 놓지 못하는 두 남녀와 그 긴장의 끈을 놓아주려는 한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명의 선택이 전쟁이 남겨둔 몰락한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위기를 넘기고 다시 살아난 리옌을 보면서 위원은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남편을 위해 살기로 다짐한 위원, 그리고 마을을 떠나가는 즈천. 리옌과 위원, 다이슈는 떠나가는 즈천을 배웅한다.

영화 '작은 마을의 봄'의 한 장면. [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얽히고설킨 사랑, 전쟁이라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이룰 수 없는 관계, 결국 반란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순종적 ‘희생’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여성의 문제를 다룬다. 페이무(費穆) 감독의 ‘작은 마을의 봄’은 이런 방식으로 장르와 역사, 여성 등의 키워드를 다룬 수작이다.

영화 '작은 마을의 봄' 감독 페이무. [사진 출처=서우후(www.sohu.com)]

중화권 영화에서 멜로드라마의 대가로는 역시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을 손꼽지만, 그보다 40년 전에 이미 중국식 멜로의 전통을 세운 페이무 감독이 있었던 것이다. 페이무는 왕자웨이 보다 한참 앞서 가슴 뛰는 멜로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뛰어난 화면과 이야기로 연출해냈다. 그리고 사회극과 역사극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영화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표적 사랑 이야기로 자리매김했다.

더불어 중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인 2005년, 홍콩영화금상장협회는 ‘작은 마을의 봄’을 최고의 중국영화로 선정했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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