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6] 북경의 바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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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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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세계와 연결하는 통상제국 구상
대 쿠릴타이를 열려던 시도가 무산되면서 쿠빌라이는 대칸의 권위와 군사력을 통해 제국 전체를 강권으로 밀어붙이기는 어렵게 됐다. 때문에 정복보다는 경영이라는 측면에 무게를 둔 통치 방식을 고려하게 된다. 초원의 군사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재정기반을 확보해 제국 전체를 하나의 물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그 것을 이루고 난 뒤 바다와 육지를 통해 세계로 연결해 가는 시스템, 즉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통상제국의 건설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 보이르호의 물새 떼]

초원 한가운데 있는 카라코룸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러한 구상을 실천에 옮겨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부(富)와 물자가 넘쳐 나는 중화경제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훨씬 효율성이 높아 보였다. 애초부터 초원과 대륙을 품에 안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동방으로 기울어졌던 쿠빌라이로서는 그 방법을 선택하는 데 별다른 거부감도 없었다.

▶ 상도로 바뀐 개평부

[사진 = 상도성 (그래픽)]

동생 아릭 부케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쿠빌라이는 우선 몽골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자신이 근거지로 삼았던 금련천 초원의 개평부로 옮겼다. 이미 개평부에는 중국식 도성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는 데 그리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옛 뭉케 정부의 인맥이 형성돼 있고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 세력이 없는 카라코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께름칙한 카라코룸 보다는 자신의 기반이 형성돼 있고 자신이 직접 건설한 개평부가 훨씬 편했다.

게다가 초원과 대륙을 한꺼번에 장악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데도 개평부가 훨씬 더 적합했다. 개평부의 이름이 상도(上都)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 상도와 중도를 오가는 양경제(兩京制)

[사진 = 상도성터]

집권 초기에 쿠빌라이는 초원에 자리 잡은 상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를 또 하나의 도읍으로 삼았다. 그래서 상도와 중도를 오가면서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를 동시에 품으려했다. 말하자면 두 곳에 수도를 두는 양경제(兩京制)였다. 여름에는 상도에서 주로 지내고 겨울에는 중도에서 주로 지냈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상도는 여름 수도, 중도는 겨울 수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당나라도 장안과 낙양 두 곳을 도읍지로 정했다.

조선도 초기에 한양과 개경 두 곳을 수도로 정했다. 이처럼 양경제의 모습이 역사상 간혹 나타나기는 하지만 쿠빌라이의 양경제는 그 것들과 다소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 것은 상도와 중도 사이의 3-4백Km에 이르는 지역 곳곳에 크고 작은 기능도시가 들어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 지역이 모두 수도권지역과 같은 기능을 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통치지역의 기본 뼈대가 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군사도시나 창고도시 그리고 공예도시 같은 것들이 이른바 수도권을 채우고 있는 도시들이었다. 거대한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수도권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를 가르는 접경지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흥안령(興安嶺)에서 음산산맥(陰山山脈)을 거쳐 기련산(祁連山)으로 이어지는 긴 띠가 그 것이었다.

▶ 유병충이 설계한 대도

[사진 = 북해공원 일대]

두 곳의 수도인 상도와 중도 가운데 앞으로 장강 남쪽의 남송을 손에 넣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중도에 더 비중이 두어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소실된 금나라 수도 중도는 제국의 수도로서는 걸맞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장강을 건너는 도박으로 많은 세력을 흡수한 뒤 당시 중도의 경화도에서 게르를 짓고 지내면서 대권장악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지금 북해공원 안에 있는 이 섬에서 지내는 동안 쿠빌라이는 아마 대권장악 이후의 통치 구상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 속에는 자신의 정권획득에 도약대가 될 현재의 자리에다 통치 야망을 펼칠 터전을 마련할 계획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대칸의 자리를 차지한 쿠빌라이는 그 때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나가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자신이 눈여겨보아 두었던 중도의 동북쪽의 호수와 섬을 중심으로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것이 바로 대도 건설의 그 출발점이었다.

그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중국인인 유병충(劉秉忠) 이었다. 유병충은 원래 승려 출신으로 유교․불교․도교에 통달하고 풍수지리에 밝은 유명한 학자였다. 스승인 해운(海雲)에 의해 금련천에 있던 쿠빌라이에게 보내진 뒤 그 곳에서 금련천 초원에 개평부 도성을 짓는 일을 주도했었다. 1266년, 쿠빌라이는 아예 도시 이름을 대도(大都)라 붙여서 그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위대한 도시 대도의 건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병충은 이번에도 대도의 설계를 맡았다.

▶ 천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흔히 북경을 천년의 고도라고들 얘기한다. 북경은 거란족 요나라의 수도로 10세기에 역사에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천년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북경은 여전히 중화문화권의 중심지로서 활기가 넘치고 있다. 한 때 ‘죽의 장막’ 속에 가리어져 있었던 이 도시는 개방의 물결을 타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짧은 시간 안에 세계의 도시로 변모했다.

▶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진 도시

[사진 = 북경거리 시민들]

북경은 동서남북의 도로가 마치 바둑판처럼 수직으로 교차하는 질서 정연한 도시다. 지금은 현대화의 물결을 타고 곳곳에 고층 건물이 올라가고 도시고속화 도로 등이 새로 건설되면서 원래의 도시 모습을 바꿔 놓고 있다. 하지만 반듯하게 짜여 진 원래를 판은 흩트려 놓지 않아 아직도 정돈된 도시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진 이 정돈된 도시의 모습은 최근에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수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 모습의 상당 부분을 원형으로 간직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12세기 때까지 중국 일부분 국가의 도시

[사진 = 천안문 광장]

중국의 동북쪽에 치우쳐져 있는 이 도시는 기원전부터 중국 북방의 핵심도시로서 역할을 해왔다. 기원전 11세기에 지금의 북경은 연나라의 도읍지로 계성(薊城)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 기원전 3세기까지 연나라는 도읍지를 여러 곳 옮겨 다녔으나 대부분 북경에 머물러 있었다.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나라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북경은 왕조의 수도는 아니었다.

당시 역사의 중심지는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었다. 북경은 변경 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그래도 중국 북방의 핵심도시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해왔다. 12세기 중반부터 북경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도읍지인 중도(中都)가 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중국 대륙 전체의 수도는 아니었다. 이들 국가는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 국가가 아니라
일부분을 차지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 세계 개념 도입한 전체 중국 도시로 탈바꿈

[사진 = 대도성(어원)]

이 도시가 명실상부하게 모든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최고 중심지이자 세계로 연결되는 도시로서 그 모습을 갖춘 것은 바로 쿠빌라이에 의해서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북경은 전체 중국의 도읍지가 된다. 또 이때서야 비로소 세계라는 개념이 도입된 도시가 된다. 숲과 물이 어우러져 있는 거의 빈터에 도시가 만들어지고 궁궐이 지어지면서 대도(大都)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그 이전시대까지 이 지역에 세워졌던 대부분의 건물들은 헐려나갔고 그 보다는 몇 배나 큰 규모의 대도성(大都城)이 건설됐다. 이 도시는 이후 7백년 이상동안 거의 다른 곳에 그 중심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은 채 거대한 중화권의 수도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 육지와 바다의 제국 출발점

[사진 = 천안문광장의 필자]

그래서 쿠빌라이가 대도를 세운 것은 중국의 역사 흐름에 하나의 전환점을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도의 건설은 통일된 중국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대도 이후의 중국은 여럿으로 갈라진 작은 중국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 거대 중국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하나의 통일된 중국은 그 영역을 중국 땅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육지를 통해,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쿠빌라이는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경영하려는 꿈을 실천에 옮긴 최초의 인물이다. 그 것은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 흐름의 대전환을 불러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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