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 약탈혼(掠奪婚)은 정당한가? ②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8-01 14: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유목민의 일반적 혼인형태-족외혼(族外婚)
수백 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내를 구해 오는 족외혼의 형태는 전통적으로 유목민들에게 일반화 돼 있는 혼인 형태다.
근친혼은 열성 유전인자가 우성 유전인자를 파괴해 그 과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백치가 되는 등 신체적․정신적 결함을 보인다는 것은 일반화 돼 있는 정설이다.

그 당시에도 유목민들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경험에 의해 근친혼의 폐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혈통이 가까운 사람과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힘써 왔다.

특히 유목민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씨족이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으려 할 경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씨족들이 사는 지역에서 상대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메르키드족의 칠레두가 거의 천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옹기라트부에서 아내를 구해 오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들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거두는 수혼제(嫂婚制)를 당연시한다.
이는 흉노 때부터 이어져온 관습이다.

앞서 왕소군이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갔다가 2년 만에 그가 죽자 그의 큰 아들인 복주루약재 선우의 아내가 됐듯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처나 형제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것이 바로 수혼제다.
이는 가계를 상속 받은 자가 선대(先代)의 처나 형제의 처를 계승함으로써 혈통의 유실을 막는 것은 물론 재산의 유출을 막고자 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아버지나 형이 죽었다고 해서 그 아내를 수절시켜 그냥 혼자서 늙어 죽게 만드는 것은 재산상으로도 큰 손실이라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더욱이 족외혼에 의해 멀리서 어렵게 구해온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상황 파악 능력․결단력 돋보인 호엘룬
몽골비사에 나타난 예수게이의 신부사냥에서 눈에 띠는 부분이 납치당한 호엘룬의 위기상황 대처 능력이나 성격이다.
상황을 재빠르게 인식하고 수용하는 현실적인 결단력은 그녀가 앞으로 맞게 될 고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만한 여장부로서 충분한 기개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뒤쫓아 오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이 그 덫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을 감지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사태를 명쾌하게 정리해 버린다.

우선 신랑인 칠레두에게 자신을 포기하고 목숨만이라도 건지는 쪽을 택하도록 요구한다.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얻을 수 있으니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살도록 하라는 권유였다.

▶ 과거와 결별, 새 운명 수용
대신 자신은 자기의 제의를 받아들여 도망가는 신랑을 보고 '오논강이 물결치도록' 울어 제치는 한바탕의 푸닥거리로 그때까지의 운명과 과감히 결별해 버린다.
그리고는 새로 다가온 운명을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그러한 호엘룬에게서 나중에 테무진이 고난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어머니로서, 또 정신적 지주로서 꿋꿋하게 테무진의 버팀목이 돼준 결단력 있고 강인한 여장부의 면모를 미리 읽을 수 있다.

호엘룬은 나중에 남편 예수게이가 독살당한 뒤 혼자가 된다.
예수게이가 죽으면 당연히 예수게이의 동생 옷치킨이 수혼제 풍습에 따라 그녀를 거둬들여 아내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예수게이 죽음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고 생각한 예수게이의 동생이 도망가 버려서 사실상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후 평생을 혼자 과부로 살게 된다.

▶ 족탈혼과 간통의 차이
남의 여자를 빼앗아 자신의 여자로 삼는 족탈혼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큰 범죄다.
더욱이 대부분 정주민 국가에서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목민국가에서 이를 당연시하는 의식은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전투에 의해서 또는 힘에 의해서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죄악이 아니라는 그들의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들이 정주민국가를 대상으로 전쟁과 약탈에 나서는 가장 큰 이유가 전리품 획득이다.
그리고 그 전리품에는 부족한 물자를 채울 수 있는 재물뿐만 아니라 여자도 포함된다.

몽골비사가 자신들의 군주의 아버지가 펼친 신부 납치 장면, 즉 약탈혼 부분을 당당하게 그리고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데서도 그러한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약탈혼에 대한 인식은 그렇지만 몽골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간음과 간통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다.

대자사크는 칭기스칸시대의 법이나 마찬가지다.
이 대자사크에는 "간통을 한자는 사형으로 엄히 다스린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다른 종족의 여자나 정주민의 여자를 약탈해 오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종족 안에서, 같은 집단 안에서 남의 여자를 가로채거나 간음이나 간통하는 경우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
쾌락을 위한 남녀의 간통과 종족 유지를 위한 풍습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사진 = 칭기스칸 동판상]

예수게이의 호엘룬 납치 사건은 칭기스칸을 있게 한 의미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몽골 후계구도에 큰 영향을 미칠 메르키드 컴플렉스 (Merkid Complex)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