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 2014년 4월에 멈춰버린 달력...단원고 교실은 1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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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1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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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단원고 2학년 반…피해학생들 흔적남긴 채 온전히 보전 중

  • 유가족들 인근 주민에게 배상금 문제로 따가운 시선 받기도

[아주경제]


11일, 지난해 단원고 2학년 1반으로 사용된 교실 달력에 수학여행이 큰 글씨로 표시돼 있다.[사진=박성준 기자]


아주경제 박성준 기자 = 지난해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이 사용하던 교실은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있었다.

교실의 보존에는 유가족의 의지가 반영됐다. 경기교육청에 따르면 세월호 희생 학생의 당초 졸업식때까지 교실을 보존한다.

빈자리를 남긴 교실은 1년 전 흔적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벽에는 2014년 4월 달력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학생들은 수학여행 기간을 특별히 큰 글씨로 표시해 뒀다. 이후 실행되지 못한 다양한 일정이 달력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교탁 위에 놓인 학급 일지는 4월 15일 이후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교실 내부는 깨끗했다. 아이들을 잊지 못한 가족들이 꾸준히 학교를 방문해 교실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11일 역시 희생학생 가족이 교실을 방문했다. 그들은 자식의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희생학생들의 책상 위에는 다양한 선물이 놓여 있었다. 최근 유행하는 허니버터칩 등 과자와 음료가 가득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국각지에서 쓴 추모편지는 교실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특히 희생학생의 책상에는 생일축하 메시지가 많았다. 세월호 참사가 만 1년이 지나는 시점으로 학생들은 모두 한 번의 생일을 거쳤다.
 

11일 지난해 단원고 2학년 8반으로 사용된 교실의 희생 학생들의 책상위에 과자와 꽃이 가득 올려져 있다 [사진=박성준 기자]


교실에 선물이 가득할수록 희생자가 많았던 학급임을 의미한다. 생존 학생의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꿈도 많고 끼도 많은 고등학생 2학년의 교실답게 뒤쪽 게시판에는 대학정보와 각자의 목표가 걸려있었다. 저마다의 꿈을 목표대학과 전공으로 표시해뒀다.

달력과 알림표가 멈춘 빈 교실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교정에 만개한 벚꽃이 적막한 교실 창틈으로 보였다.

세월호 참사 이전 325명이던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은 현재 88명이 남아 있다. 생존학생 75명과 수학여행을 가지않은 13명이다. 3학년으로 진급한 이들은 현재 4개반으로 나눠져 수업을 받고있다. 또 생존학생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서는 교내에는 스쿨닥터가 상주하고 있다.

멈춰선 단원고 2학년 교실처럼 유가족의 아픔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단원고 인근에는 지난 4월 2일부터 416기억전시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학생들의 ‘빈 방’이 사진이 전시돼 있다. 각자의 방은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여학생부터 프라모델과 듀얼스크린의 컴퓨터까지 학생들의 취미는 다양했다.

기억저장소 관계자는 “희생학생의 어머니가 오면 아이들 방을 자주 들여다본다”며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잊지 못해 영정사진을 낮에는 책상에, 밤에는 침대에 두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그동안 따가운 시선을 받은 일도 전했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김모 군의 어머니는 동네 분식집을 이용하던 중 인근 주민에게 “8억이나 받았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받았다. 당시 너무 억울한 어머니는 "당신에게 8억을 줄테니 자식을 버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날 416기억저장소에서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권순범 학생의 어머니 최지영 씨를 만날 수 있었다.
 

416기억전시관에서 권순범 학생의 어머니 최지영씨가 아들의 방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사진=박성준 기자]


최씨는 오랜 투쟁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기억저장소를 방문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동안 자식의 방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최씨는 아이들 방 사진을 가리키며 “아들이 이곳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깔깔대며 웃는 모습이 선하다”고 말했다.

모든 부모와 마찬가지로 최씨에게 아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최씨는 “어릴때는 몰랐는데 아들이 크니 옆에만 있어도 든든했다”며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안보이게 되니 참 힘들다”고 털어놨다.

최씨의 기억에 남은 권순범 학생은 집안일도 돕고 부모님도 챙기는 착한 아들이었다.

최씨와의 대화 과정에서 세월호 인양에 대한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여론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지만 최씨의 인양에 대한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가족들이 풍찬노숙을 버티며 인양을 요구하는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결과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지막 집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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