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2] 샤머니즘과 불교는 어떻게 융합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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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1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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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교인 90%가 티베트 불교 신자
지난 2015년 조사에 따르면 몽골 전체 인구의 60%가 종교를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90%가 티베트 불교, 5%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가 2%이고 나머지는 샤머니즘 등으로 분포돼 있다.

▶ 라마교보다는 티베트 불교

[사진 = 복드산의 부처상(울란바토르)]

외부에서는 흔히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라마라는 용어는 인도에서 정신적 스승을 일컫는 구루(Guru)라는 말을 티베트어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라마교라는 이름은 티베트 불교의 승려를 라마승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라마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슬람교를 모하메드교라고 잘 못 부르는 것과 같다. 특히 이 같은 명칭은 중국 쪽에서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2차 대전 이전까지는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라마교라는 말에는 우상숭배라는 멸시적인 의미가 있는 데다 불교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 않아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티베트 불교가 몽골과 중앙아시아,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교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합당한 부름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몽골의 티베트 불교를 몽골 불교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 샤머니즘, 몽골인 의식세계 지배
16세기 티베트 불교가 몽골로 본격 유입된 이후 불교는 몽골인들의 생활 속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몽골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던 민속 신앙, 즉 샤머니즘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다. 텡그리(하늘)를 최고의 신으로 하는 몽골 샤머니즘은 몽골인들의 의식세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칭기스칸도 바로 이 샤머니즘의 바탕 위에서 몽골고원을 통일했고 세계정복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즉 텡그리가 칭기스칸으로 하여금 대지를 다스리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유목민들에게 비록 통치자의 강압적인 요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티베트 불교로의 개종이 쉽게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티베트 불교와 샤머니즘의 융합
그래서 몽골로 들어온 티베트 불교는 토착 샤머니즘과 융합하는 과정을 보였다. 즉 티베트 불교는 몽골 고유의 샤머니즘 쪽으로 다가서고 샤머니즘은 티베트 불교 쪽으로 다가갔다는 설명이 옳을 것이다. 특히 티베트 불교는 이미 티베트에서 샤머니즘 성격을 띤 토착 종교와 한차례 융합을 거친 상태였기 때문에 몽골 샤머니즘과의 접합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몽골의 유목민들도 다른 종교와는 달리 밀교적(Tantric)성격을 띤 티베트 불교에 큰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라마승이 샤먼과 마찬가지로 예언과 주술을 하면서 몽골인들의 저항감을 무디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몽골의 샤머니즘은 티베트 불교의 외형을 빌려 상당 부분 그대로 존속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 게르마다 모셔둔 불상․탱화

[사진 = 울란바토르 교외 오보]

지금의 몽골인들도 하늘과 땅, 조상들을 위해 술을 바친다. 또 여행 중에 우리의 서낭당 같은 오보를 만나면 그 것을 세 바퀴 돌고 돌을 던지는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몽골 불교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생활에서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샤머니즘적 요소들이 남아 있기는 했어도 티베트 불교는 몽골인들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하다.
 

[사진 = 오보 도는 몽골인들]

몽골 각 지역의 유목민 게르를 방문했을 때 그 곳에서 불상이나 탱화를 보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불교 경전에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불교를 믿어야 화(禍)가 찾아오지 않고 복을 받는다는 의식은 분명한 것 같았다.

▶ 수태차도 티베트 불교 영향

[사진 = 수태차]

유목민들은 매일 수태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화 돼 있다. 이 것 역시 수태차를 마시는 라마승들의 풍습이 그대로 유목민들에게 전해진 경우다. 수태차는 찻잎을 끓인 물에 우유에 섞어 만드는 것으로 유목민들은 우리가 숭늉 마시듯이 수태차를 마신다. 말을 순장하는 풍습도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함께 사라졌다. 불상에 공양을 바치고 경전을 암송하는 것도 생활화 됐다.

사회주의 시절 2만 명 이상의 라마승이 처형되고 거의 모든 사찰이 파괴되는 된서리를 맞았다. 사회주의 체제를 걷어내고 티베트 불교를 되살리기 시작한지 10년 남짓 만에 불교는 몽골인들의 생활 속에서 부활됐다.

▶ 역사적 바탕으로 빠른 부활
빠른 시간 안에 불교가 부활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티베트 불교가 3백년 이상 몽골의 역사의 밑바닥에서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유목민들의 생활 속에도 뿌리를 내렸었기 때문일 것이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인들의 생활 속에 얼마나 파고 들어가 있는지는 몽골인들의 민속행사의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와 융합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사진 = 알탄오보(다리강가 지역)]

몽골의 동부 다리강가 지역에서 지켜본 알탄오보제(Altan Oboo祭)도 티베트 불교의 의식아래 치러지고 있었다. 우리의 성황당과 비슷한 오보에서 거행된 민속행사는 라마승의 주도아래 거의 티베트 불교 의식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몽골의 다리강가 지역은 몽골의 동남부 중국과의 국경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알탄오보제는 날이 밝기 전에 다리산의 정상인 알탄오보에서 열렸다.

▶ 라마승 독경과 함께 시작된 오보제

[사진 = 오보제 참가 몽골인 행렬]

새벽 4시, 여명이 다가오면서 사그라져 가는 달빛 아래서 라마승의 독경소리와 함께 알탄오보제가 시작됐다. 오보의 기원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몽골비사에 관련된 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칭기스칸 시대 이전부터 있어왔던 민간 신앙이 분명하다. 그 것이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함께 불교적인 색채를 띠면서 더욱 민간 속으로 확산된 것이다.
 

[사진 = 티베트불교식 오보제]

현재 치러지는 오보제가 거의 티베트 불교 의식에 따라 라마승이 주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 구백지공의 등장

[사진 = 구백지공]

이른바 주요 인사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제단 주위에 둘러서자 승려들의 독경이 북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어 제물로 바쳐질 흰말이 등장했다. 뒤이어 오보의 주신을 상징하는 흰 토크를 치켜든 병사 복장의 남자를 시작으로 노란색 깃발을 든 남자들이 아홉 마리의 흰말을 타고 제단 앞으로 등장했다. 아홉 마리의 흰말은 ‘구백지공(九白之貢)’이라 해서 상서로운 것을 상징한다.

▶ 평화를 상징하는 흰 토크

[사진 = 초원의 비구름]

병사가 든 흰 토크는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로 나라와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노란색 깃발에는 불교의 상징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아래 있었을 때 몽골의 칸들은 청나라에 공물을 바칠 때 여덟 마리의 흰말과 한 마리의 흰 낙타를 바친 것으로 전해진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경전 읽기가 끝나자 구백지공이 퇴장했다.

이어 제단에 바쳐진 음식물들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우리네 음복(飮福)과 흡사한 의식이었다.

▶ 5년마다 열리는 알탄오보제

[사진 = 오보 참배하는 몽골인들]

다리산 알탄오보제가 부활된 것은 1990년,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던 바로 그 해였다.사회주의 시절에는 불교와 민속신앙에 대한 말살 정책으로 눈에 드러나는 대규모 행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특히 오보제가 티베트 불교 의식에 따라 진행됐으니 금지된 것은 당연했다. 비록 대규모 행사는 열지 못했지만 오보에 대한 믿음만은 눈에 드러나지 않게 명맥을 유지해왔다.

▶ 산 위는 여성 금지구역

[사진 = 오보제 참배하는 산 아래 여인들]

오보제 때 산 위에 올라와 있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성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 특이했다. 반면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의 오보제가 여성들은 참가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것은 여성이 참여할 경우 부정이 탈 수 있다는 전근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산에 올라오지 못한 채 산을 에워싸고 마치 산 전체를 오보처럼 생각하고 의식을 올리고 있었다. 강강수월래 하듯 산을 세 바퀴 돌고 손을 모아 기원을 올리는 여인이 있는가하면 아예 몸 전체를 땅 바닥에 던지며 오체투지(五體投地)한 채 몸을 움직이지 않는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 생활 속에 젖어든 불교

[사진 = 오보제 주관하는 승려들]

오보 참배를 마친 사람들은 산기슭에 걸터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가져온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면서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성스레 노인을 부축하며 안내하고 있는 젊은이들, 천진스럽게 주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어린이들, 음복으로 마신 술기운이 적당히 돌아 기분 좋게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어른들, 이 모든 모습이 마치 우리네 명절날 볼 수 있는 분위기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성황당과 같은 오보에서 거행되는 행사는 많은 부분에서 몽골 민속 신앙의 영역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행사는 라마승의 주관으로 불교 의식에 따라 치러지는 모습에서 몽골 전통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가 함께 융합돼 몽골인들의 생활과 의식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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