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다가서자 전면 그릴과 실내 조명이 차례로 켜졌다. 문을 열자 미디어가 재생되며 운전자를 맞았다. 차에 타기도 전부터 운전자를 알아보는 듯한 경험이다. 르노의 새로운 글로벌 플래그십 크로스오버 '필랑트'는 첨단 기술을 앞세우면서도 운전자가 차를 직접 조작하는 감각을 놓지 않았다. 화려한 디지털 장비와 묵직한 주행감, 하이브리드 특유의 효율성을 한데 묶은 것이다.
지난 16~17일 인천에서 군산까지 왕복 약 700㎞를 달리며 확인한 필랑트의 강점은 화려한 기능보다 매일의 주행을 편안하게 만드는 기본기에 있었다. 디지털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조작의 직관성과 주행의 안정감, 장거리 효율을 함께 챙겼다.
최근 신차들이 물리 버튼을 줄이고 터치스크린 중심으로 조작 체계를 바꾸는 것과 달리 필랑트는 손으로 조작하는 감각을 상당 부분 남겨뒀다. 기어 변속도 스티어링휠이나 다이얼·버튼 방식이 아니라 센터 콘솔에 자리한 변속 조작계를 이용한다. 디지털화에 익숙한 운전자라면 다소 투박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주행 중 조작의 직관성을 중시하는 운전자에게는 오히려 편안한 구성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경험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운전석 계기판과 중앙 화면, 동승석 화면이 이어지는 파노라마 구성을 갖췄다. 차에 다가설 때 조명이 켜지고 탑승과 함께 미디어가 이어지는 경험부터 장거리 주행을 뒷받침하는 연비와 정숙성까지, 편의 기능을 일상적인 주행 경험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다.
필랑트의 장점은 운전할 때, 특히 장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군산까지 시내와 고속도로를 오가며 달리는 동안 확인한 연비는 최대 20㎞/ℓ에 육박했다. 시내 주행에서는 연비가 떨어지더라도 15㎞/ℓ 안팎을 유지했다. 공인 복합연비 15.1㎞/ℓ를 웃도는 수치다. 공인 연비를 기준으로 계산한 1회 주유 주행거리는 약 830㎞로, 장거리 이동에서도 주유 부담을 덜 수 있다.
이 같은 효율은 필랑트의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맞물린다. 전기 모드와 엔진 주행이 자연스럽게 전환되고 변속 충격이 두드러지지 않아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도심부터 속도를 유지하는 고속도로까지 이질감이 적었다.
주행감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전장 4915㎜, 축거 2820㎜의 차체는 도로 위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스펜션은 노면의 충격을 걸러내면서도 차체를 단단하게 지지했다. 부드럽기만 한 승차감보다는 차체가 안정적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이 강했다. 덕분에 왕복 7시간 넘는 운전 시간에도 피로감이 크게 쌓이지 않았다.
정숙성도 장거리 주행의 만족도를 높였다. 필랑트는 모든 트림에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을 적용했고, 차체의 흡차음 설계도 강화했다. 가속할 때 엔진 소리가 실내로 두드러지게 파고들지 않았고, 고속 주행에서도 실내가 비교적 차분하게 유지됐다. SUV 특유의 높은 차체와 넓은 공간을 갖췄지만 실내 분위기는 오히려 세단에 가까웠다.
필랑트의 경쟁력은 디지털 기술과 주행 기본기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다는 데 있다. 화면과 조명으로 미래적인 인상을 주면서도 조작 방식은 익숙함을 유지했고, 묵직한 차체와 정숙성으로 장거리 주행의 부담을 낮췄다. 물리 조작계가 다소 투박하게 느껴질 수 있고 디지털 구성 역시 운전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연비와 승차감, 실내 정숙성을 두루 중시하는 소비자라면 눈여겨볼 만한 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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