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극심한 정체를 뚫고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모습은 추석을 앞두고 벌어지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 뒤 귀경하는 사람들로 인해 추석 연휴 내내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 찬다. 물론 이러한 모습에도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많아졌고, 추석 연휴를 이용해 국내외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올해 추석 차례를 지낼 계획이 있다고 응답한 가구는 전체의 27%에 불과했다.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추석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귀성으로 대표되는 추석 풍경이 한국인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추석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명절이 인도네시아에도 있다.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는 라마단 기간이 끝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르바란(Lebaran)이 그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부모와 친지, 이웃을 방문해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주고받는다. 1980년대 이후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이주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규모 귀성 행렬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르바란 귀성객은 1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을 웃도는 엄청난 규모이다.
르바란을 며칠 앞둔 시점부터 미디어에는 귀성길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시간 절약을 위해 어떤 경로를 이용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는 정보가 폭증한다. 르바란이 가까워질수록 언론 보도는 귀성객의 경험담으로 채워진다. 평소 대여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른 새벽에 출발해 늦은 저녁에야 도착했다는 식의 이야기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언급하는 사연이 대표적이다. 귀성객이 이용하는 교통수단도 기차, 자동차, 비행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토바이로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사람도 있으며, 며칠에 걸쳐 배를 타고 귀성길에 오른 사람도 있다. 말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이 동원된다.
귀향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르바란도 우리 추석처럼 긴 연휴로 지정되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식 공휴일은 이틀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르바란을 위한 실제 휴일이 거의 두 주 가까이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공식 공휴일을 전후한 2~3일을 단체 휴가일로 지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단체 휴가일을 전후한 며칠 동안을 출근 없이 근무하는 기간으로 정함으로써, 실질적 휴일은 더욱 연장된다. 공무원의 경우 올해 르바란 휴무와 근무 조정 기간은 두 주에 걸쳐 이어졌다. 이는 대부분의 민간 기업에도 적용되었으며 학생에게는 2~3주 가량의 방학이 주어졌다.
대표적인 추석 행사로 차례와 성묘가 있다면, 르바란 아침에는 자녀가 부모에게 인사를 하는 관습이 이어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며, 부모는 이를 받아들이고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준다. 이때 용서를 구하는 대상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품었던 잘못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관행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르바란 기간에 만나는 친척과 이웃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많은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용서를 구하다 보면 그것이 형식적인 성격을 띨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종교적 자의식이 가장 고양되는 라마단 직후에 르바란을 맞이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용서의 인사를 전적으로 형식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는 적절치 않다. 실제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복받침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부모에게 인사를 드린 뒤에는 가까운 친척과 이웃을 비롯해 넓은 범위의 사람을 방문한다. 요즘에는 이웃 간 방문 범위가 축소되는 경향도 나타나지만, 내가 자바 농촌에서 조사하던 당시만 해도 청년들이 함께 모여 며칠 동안 수십여 집을 방문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들과 함께 돌아다니다 보면 때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평소와 달리 방문하는 집마다 다과를 준비해 두었는데, 문제는 그 종류가 대체로 비슷했다는 점이다. 한나절 동안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설탕이 듬뿍 든 커피나 차를 마시고 몇 조각의 쿠키를 먹다 보면, 다음 집으로 향하는 일이 점점 버겁게 느껴졌다. 먹고 마실 것이 풍성하다는 점은 르바란의 특징이지만, 방문객 입장에서 그것이 언제나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음식 대접과 비슷한 맥락에서 르바란 기간에는 현금이 오가기도 한다. 우리의 세배와 마찬가지로 아이와 청소년에게 소액의 돈을 주는 관행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들었던 흥미로운 소문은 이웃 마을 출신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 르바란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와 현금을 나누어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르바란이 되자 몇몇 청년이 방문 계획을 세웠고, 나 역시 호기심이 생겼다. 이들을 따라 방문한 그 사람 집 앞에는 엄청난 규모의 인파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번이 되어 집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꾸러미가 쌓여 있었고, 생필품과 함께 현금이 들어있는 꾸러미가 주어졌다. 조사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돈을 받아본 경험이었다.
이처럼 르바란 기간에는 지역 유력인사를 찾아가는 관행이 형성되었는데, 요즘에는 이를 ‘오픈 하우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방문 대상에는 대통령도 포함된다. 대통령궁을 개방해 일반인의 방문을 받고, 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 물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운이 좋은 수천 명 정도로 그 대상이 한정된다.
선물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으며, 아래에서 위로 향하기도 한다. 직접 찾아가지 못한 친척 어른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이 전형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 관행이 본래의 의미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직장 상사처럼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선물이 단순한 명절 인사를 넘어 상대방의 호의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공직자를 대상으로 르바란 기간의 선물 수수와 관련한 규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선물 교환을 통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르바란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많은 지출이 요구된다. 선물을 보내야 하고, 용돈을 주어야 하며, 새 옷을 장만하고 음식을 비롯한 여러 준비도 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자리 잡은 관행이 르바란 상여금이다. 공식, 비공식 부문을 막론하고 르바란을 맞이하여 고용주는 피고용인에게 일정한 보너스를 지급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기대는 관행의 차원을 넘어 정부 규정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근로자의 경우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한 달 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으며, 일용직 노동자 역시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상여금을 산정한다. 관행과 제도 양쪽에서 보너스 지급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다 보니, 이를 지급하지 않는 사업주는 악덕 고용주로 인식되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분위기를 악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사업체 주변의 주민 단체가 르바란 상여금을 요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는 심각한 일탈로 간주되며, 정부 역시 이를 금지한다. 그럼에도 지역 사회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사업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기부금을 제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업주의 처지에서 르바란은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명절임이 분명하다.
르바란 휴가가 어느 정도 흘러가면 이번에는 대도시로 돌아가는 귀경 물결로 도로가 채워진다. 고속도로의 일방향 통행은 대도시를 향한 쪽으로 전환되며, 귀경길의 어려움을 다룬 사연이 다시 언론을 채운다. 요즘에는 그 경향이 약해졌지만, 이러한 귀경 행렬에 또 다른 현상이 더해지기도 한다.
하나는 귀성객이 돌아오면서 친척이나 지인을 함께 데려오는 일이다. 한때 자카르타에서는 주민등록증 검사를 통해 이러한 방식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차단하려 했을 정도로, 르바란 이후 대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심각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귀성길에 오른 사람 중 일부가 귀경하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는 경우이다. 특히 가사도우미가 돌아오지 않아 곤경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널리 회자할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사업체에서도 르바란 이후 직원이 출근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이는 르바란 귀향이 단순히 사람의 이동에만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대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을 통해 일자리와 임금, 생활 방식, 소비 문화와 같은 다양한 정보가 유통된다. 대도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농촌으로 전해지고, 농촌의 관계가 도시로 이어지면서 도농 간 교류가 한층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셈이다.
추석을 보내는 우리의 방식이 변해온 것처럼 르바란을 보내는 방식 역시 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명절 자체의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조상에 대한 의례와 가족 공동체를 둘러싼 전통적 의식이 약화하면서 추석을 보내는 방식이 변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한 달간의 금식을 마치고 이를 기념한다는 르바란의 종교적 의미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르바란은 변화하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명절이라 말할 수 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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