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을 가로지르는 6차선 대로, 양재대로는 강남의 화려한 오피스텔과 고급 아파트 단지를 향해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그저 또 하나의 분주한 간선도로처럼 보인다. 매일 수천 명이 이 길을 건너지만, 누구도 이 도로에 두 번째 생각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극명하게 서로 다른 두 경제 현실을 갈라놓는 도로는 흔치 않다.
한쪽에는 3.3제곱미터당 2억 원을 훌쩍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아파트 단지가 서 있다. 그 가치는 인공지능 붐과 함께 계속 치솟고 있으며, 이 붐은 반도체 기업들을 국내에서 가장 값진 기업으로 만들었고, 한국의 명목 경제성장률을 지난 30년래 가장 강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그 도로를 건너면, 또 다른 서울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구룡마을이다. 21세기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이지만, 이 마을을 며칠간 걸으며 취재하는 동안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가난의 풍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인 것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마주치게 되는 어떤 본능, 교육으로 자식의 삶을 바꾸겠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안쪽을 걷다 우리는 파란 나시를 입고 천천히 걸어가는 1지구 주민 한 분을 만났다. 1952년생 천영환씨, 1지구의 초대 지구장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우리를 경계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우리는 구룡마을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겪었던 문제는, 사실 우리가 마을 초입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의 정체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당시, 구룡마을이 일종의 행정적 사각지대였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주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두 아들이 어렸을 때, 실질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인정받는 주소가 없으니 그가 원하던 공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인근 아파트의 한 가정을 찾아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 주소로 아이들 만 이라도 옮길 수 있기를 부탁했다고한다.
"사정사정했죠." 그가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이 이야기만 놓고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 후에 구룡마을에 한번도 와본적 없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다니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일반적인지, 다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서울인근의 손꼽히게 부유한 동네인 분당에서 만난 한 담임교사는,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이 오히려 결석이 가장 잦은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법이 요구하는 최소 출석일수를 정확히 계산해 채우고, 나머지 시간은 공교육보다 빠르게 진도를 나가는 학원에서 보낸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한 명문 사립초등학교에 딸을 보내는 어머니는, 그 학교의 매력은 사실 커리큘럼이 아니라고 말했다. 평생 가는 친구 관계, 그것이었다. 천영환씨는 자신의 아들들을 공립학교에 보낼 방법을 찾느라 피나는 노력을했었다. 하지만 다른 부모들은 이미 좋은 학교에 자녀들이 다니고 있는데도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서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붓고 있는것이다. 그들은 결국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노력의 다른 형태이다.
천영환씨는 우리에게 보여줄 곳이 있다며, 겨우 허리를 굽혀야 지날 수 있는 좁은 통로로 우리를 이끌었다.
며칠 전 몸이 안 좋아 마을을 떠난 친구의 집이라고 했다.
벽지는 곰팡이로 얼룩덜룩했지만, 이는 그가 떠난 뒤 갑자기 생긴 흔적이 아니라, 애초에 그 곰팡이와 함께 살아온 흔적이었다. 그럼에도 떠나는 날까지 공부를 놓지 않았던 흔적은 그 방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 책상에 쌓인 더 많은 책, 벽 곳곳에 붙은 자료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공부했던 사람의 흔적이었다. 천영환씨는 그 친구가 마을 이 집 저 집을 돌며 책을 빌려 공부를 이어갔다고 했다. 몸이 아파 떠나야 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배움이 곧 이곳에서 살아남고, 계속 일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온 사람이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결국 마을을 떠났다고 했다.
바로 옆집도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조금 더 전에 비워진 집이었다. 이 집 역시 이주하며 미처 가져가지 못한 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먼지 쌓인 책 몇 권이 선반 한쪽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앞서 본 방만큼 절박하진 않았지만, 이 집 역시 누군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흔적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우리는 비슷한 흔적과 계속 마주쳤다. 누군가의 집 한편에는 신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챙겨 읽었을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배움이란 학교 담장 안에만 갇힌 것이 아니라, 매일 세상과 이어져 있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다시 천영환씨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며, 실제로 구룡마을에서의 삶이 어떤 지에 대해 조금 더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냉장고에는 마시다 만 막걸리 한 병과 각종 반찬이 들어 있었고, 먹고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우리가 구룡마을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댁에서 함께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천영환씨는 지금 혼자 살고 있었다, 한때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함께 살았던 바로 그 집에서. 그가 그랬듯, 이곳 주민들 다수는 애초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가족을 마을 밖에 살게 하고 본인만 구룡마을에 남아 일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다 커서, 그가 여전히 고향이라 부르는 이 마을을 떠난 지 오래다. 손자들도 마찬가지다. "다 나갔어요." 그가 말했다.
"나갈 때가 되니까, 나가라고 그랬죠."
현재 구룡마을에 살고 있는 학생이 있는 가정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마을 밖에서 지내다가, 가끔씩만 구룡마을로 돌아온다고.
이곳에 남은 이들은 정작 본인들이 살아온 삶 자체를 힘들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본인이 더 공부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아이들을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지 못했던 것. 그래서였을까, 이들은 하나같이 자식들만큼은 마을 밖으로 내보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그 갈증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본인들의 열정은 이미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자식들만큼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이곳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여전히 그 열정을 태우고 있었다. 지금도 이 집 저 집 책을 빌리고 돌려주며, 서로의 공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계속 일해나가기 위해 평생 놓지 않았던 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이야기가 이어진 뒤에야, 천영환씨는 우리를 다시 밖으로 이끌어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의 한 자리를 가리켰다.
몇 번이나 지나쳤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던 그 자리였다.
그제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홀로 서 있는 녹슨 그네 철조물.
누군가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곳을 가득 채웠었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철제 구조물이었다.
그 웃음소리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정확히는, 더 나은 학교와 더 나은 미래를 좇아 마을 밖으로 떠밀려 나간 것이었다. 남은 것은 조용히 녹슬어가는 그네와, 그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 있어 이곳이 얼마나 오래 비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풀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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