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도, 기업가치도 아니었다. 상장 폐지 위기에 몰린 '추억의 브랜드'를 살리겠다는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주가를 끌어올렸다.
한국거래소가 이달부터 상장 유지 기준을 대폭 강화하면서 코스닥 시장에서는 이미 관리 종목 지정이 현실화하고 있다. 강화된 규정 시행 2주 만에 시가총액 미달을 이유로 관리 종목 지정 우려 공시를 낸 기업이 9곳에 달했고, 이 가운데 5곳은 실제 관리 종목으로 지정됐다. 다음 달부터는 주가 1,000원 미만 '동전주'를 대상으로 한 관리 종목 지정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벼랑 끝에 선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과 유상증자,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주가 방어에 나섰지만, 상장 폐지 우려에 따른 매도세와 상장 유지 기대 매수세가 뒤섞이면서 주가는 급등락을 반복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흐름도 나타났다. 모나미와 한성기업처럼 오랜 기간 국민들에게 친숙했던 기업들에는 개인 투자자들의 '응원 매수'가 몰리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시가총액을 상장 유지 기준 이상으로 끌어올려 상장 폐지를 막아보자는 움직임이었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 대표 브랜드를 지키려는 애국심"이라는 평가와 "손실을 줄이려는 자기 방어이자 또 다른 투기"라는 시각이 맞선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회사를 살리겠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결국 투자자들은 자신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움직인다"며 "'응원 매수'라는 표현만으로는 이번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초 시장에서는 강화된 상장 유지 기준으로 부실기업에 대한 투자심리가 더욱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일부 개인 투자자들은 오히려 상장 폐지 위기에 놓인 기업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며 시장의 예상을 뒤집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김밥 재료로 친숙한 '크래미’로 알려진 수산식품업체 한성기업이다.
한성기업은 원재료 가격 상승과 수익성 악화로 시가총액이 287억원까지 떨어지며 새 상장 유지 기준(300억원)을 밑돌아 상장 폐지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지난 6일 4635원이던 주가는 10일 8460원으로 약 일주일 만에 두 배 가까이 뛰었다. 9일과 10일에는 이틀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고, 14일 오후 2시 40분 기준 주가는 전일 대비 26.83% 오른 1만730원에 거래됐으며 장 중 상한가인 1만990원까지 근접하며 강세를 이어갔다.
반전의 계기는 실적도, 구조조정도 아니었다. 온라인 투자 커뮤니티에 한성기업이 약 25년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음악회를 열어왔다는 등 사회 공헌 활동을 소개하는 글이 확산되며 "이런 기업은 없어지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후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빠르게 유입되며 시가총액은 525억원까지 늘어나 상장 폐지 기준을 웃돌았다.
국민 볼펜 브랜드 모나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모나미 주가는 7월 6일 1318원에서 2145원으로 일주일 동안 62% 급등했다. 이틀 연속 상한가에 근접한 뒤 14일에도 상승세를 이어가 오후 2시41분 기준 전 거래일 보다 17.02% 오른 2510원을 기록했다. 장 중에는 상한가 직전인 2780원까지 치솟았다. 시가총액도 249억원에서 405억원으로 불어나 상장 폐지 우려에서 벗어났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36세 IT업계 종사자 이모 씨는 "요즘 문구점 갈 일은 거의 없지만 얼마 전에도 모나미 3색 볼펜 세트를 온라인으로 샀다"며 "가격도 저렴하고 필기감도 좋아 늘 믿고 쓰던 제품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일부러 모나미 볼펜을 가져가 썼다"고 말했다.
이 같은 애정은 온라인 투자 커뮤니티에서도 확인됐다.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켜온 브랜드", "없어지면 안 되는 회사"라는 반응이 잇따랐다.
한성기업은 7일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최근 온라인과 SNS에서 한성기업을 좋게 봐주시고 보내주시는 칭찬과 응원에 많이 감사드린다”며 “1963년 첫 항해를 시작한 때부터 그래왔듯 ‘좋은 식품’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송재화 모나미 사장도 10일 모나미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린 자필 입장문에서 “상장 폐지가 될 수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나미를 믿고 응원하며 함께해주신 여러분의 마음은 큰 힘이 됐다”며 “대한민국의 기록을 함께해온 모나미가 앞으로도 여러분 곁에 든든하게 서 있겠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주가가 급등하자 온라인 투자 커뮤니티에서는 '응원 매수'를 둘러싼 논쟁도 달아올랐다.
네이버 종목토론방에는 "모나미는 애국기업이다. 광복절까지 1만원 보내자"는 글이 올라왔고, 다른 투자자는 "배당도 하는 좋은 회사"라고 평가했다.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 투자자는 "애국심을 이용한 주가 부양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투자자는 "상장 폐지가 곧 회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식을 사지 말고 제품을 사라"고 주장했다.
한 투자자는 "애국심이고 뭐고 일단 내가 살아야 한다"며 투자자들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냈다.
이번 현상은 2019년 '노 재팬(No Japan)'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확산됐던 2019년 7월 4일 모나미 주가는 상한가(29.88%)를 기록하며 3325원에 거래를 마쳤다. 일본 문구 대신 국산 제품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다음 날에는 국산 의류 브랜드 탑텐을 운영하는 신성통상이 유니클로의 반사이익 기대감으로 장중 26.6%까지 급등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 랠리는 실적보다 상장 폐지 방어 심리가 이끌었다는 점에서 당시와 다르다.
이 교수는 이번 사례가 현행 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가총액이 300억원 기준으로 상장 폐지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은 반복될 수 있다"며 "제도를 보다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투자자들의 기대 심리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지막 순간 누군가 회사를 인수하거나 정부가 지원해 줄 것이라는 가능성을 기대한다"며 "설령 그런 일이 없더라도 주가가 이미 헐값까지 떨어져 추가 손실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양 교수 이번 사례를 2021년 미국 게임스톱(GameStop) 사태와 비교했다. 당시 실적 부진에 시달리던 게임스톱에는 주가 하락에 베팅한 헤지펀드들의 공매도가 집중돼 있었다. 이에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월스트리트베츠(WallStreetBets)' 개인 투자자들이 "공매도 세력에 맞서자"며 주식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주가가 급등하자 공매도 투자자들은 손실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빌려 판 주식을 다시 사들여야 했다. 이른바 '쇼트 스퀴즈(short squeeze)'가 발생하면서 추가 매수세가 유입됐고, 게임스톱 주가는 2021년 1월 초 17.25달러에서 같은 달 28일 장중 483달러까지 치솟았다.
두 사례 모두 기업의 실적이나 본질적 가치보다 개인 투자자들의 집단 심리가 주가를 움직였다는 점에서 닮았다. 양 교수는 "이 역시 정상적인 투자라기보다 공매도 세력을 응징하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던 사례"라고 덧붙였다.
온라인에서는 이번 현상을 자조적으로 바라보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게시글은 "세계는 인공지능(AI)을 이야기하는데 한국 증시는 게맛살과 볼펜 주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현실을 꼬집었다.
이번 '응원 매수'가 진정한 애국 투자였는지, 또 하나의 투기였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당장은 모나미와 한성기업 모두 상장 폐지 위험에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관심이 식은 뒤에도 지금의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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