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와 산업, 국방과 외교, 교육과 의료, 문화와 예술, 심지어 인간의 사고방식과 노동의 개념까지 바꾸는 범용기술이다. 과거에는 철강 생산량이 국력을 결정했고, 석유 확보 능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면, 오늘날에는 반도체와 AI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교수는 한 대담에서 의미 있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보여준 강점은 위기를 극복하는 ‘서바이벌 마인드(Survival Mind)’였지만, AI 시대에는 세계를 선도하는 ‘그레이트 마인드(Great Mind)’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많은 전문가들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나라지만, 이제는 추격자의 위치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설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생성형 AI의 발전은 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GPT-3.5에서 GPT-4, GPT-5로 발전할수록 AI는 더 많은 문서를 기억하고, 더 긴 대화를 유지하며, 더 복잡한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AI 경쟁의 핵심은 단순한 연산 속도가 아니라 저장 능력과 기억 능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AI가 인간처럼 사고할수록 메모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 80년 동안 컴퓨터 산업은 폰 노이만 구조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연산 장치와 저장 장치를 분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CPU와 GPU의 성능 향상 속도를 메모리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병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HBM(고대역폭 메모리)이다. 오늘날 AI 데이터센터 경쟁력은 사실상 HBM 경쟁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HBM 하나가 아니라 D램과 낸드플래시, S램과 V램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메모리 솔루션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AI 혁명은 반도체만 성장시키지 않는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송배전 설비와 변압기, 전선 산업이 함께 성장한다. 자율주행차와 로봇, 스마트공장과 스마트물류가 발전한다. 결국 AI 혁명은 하나의 산업혁명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바꾸는 문명혁명이다.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세계는 지금 네 개의 축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대만과 일본이다.
미국, AI 제국의 중심
현재 AI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미국은 AI 생태계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오픈AI와 구글,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과 엔비디아, 애플과 테슬라가 모두 미국 기업이다. 세계 AI 산업의 상류와 중류, 하류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엔비디아는 AI 시대의 새로운 석유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석유가 산업사회의 혈액이었다면 오늘날 AI 시대의 혈액은 연산 능력이다. 엔비디아는 그 연산 능력을 공급하는 핵심 기업이다.
미국의 진정한 강점은 기술만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 세계 최고의 연구소, 세계 최고의 벤처투자 시스템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스탠퍼드와 MIT, 버클리와 카네기멜런, 하버드와 프린스턴은 매년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를 배출한다. 실리콘밸리는 실패를 용인하면서도 혁신을 장려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기술과 자본, 인재와 플랫폼을 모두 보유한 유일한 국가다. 향후 20년 동안 AI 패권의 가장 강력한 후보 역시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에도 약점은 존재한다. 설계는 세계 최고지만 생산은 상당 부분 대만과 한국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최근 반도체 제조업 부활에 수백조 원을 투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 14억 인구의 AI 대장정
중국은 미국에 맞서는 유일한 경쟁자다.
중국의 가장 큰 자산은 인구와 시장이다. 14억 인구가 생산하는 방대한 데이터는 AI 시대의 거대한 자원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장기 전략을 세우면 10년, 20년 단위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갖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와 AI 굴기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화웨이와 SMIC, 바이두와 알리바바, 텐센트와 딥시크는 중국 AI 생태계의 핵심 축이다.
특히 제조업 AI와 로봇,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중국의 공장 자동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기차와 드론,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는 미국도 긴장할 정도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약점은 첨단 반도체다. 미국의 수출 규제는 중국의 가장 큰 부담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중국의 기술 자립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향후 20년은 미국과 중국이 AI 패권을 놓고 벌이는 새로운 냉전의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 세계 경제의 심장
대만은 작은 섬나라지만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 이유는 TSMC 때문이다. TSMC는 세계 최첨단 파운드리 시장의 절대 강자다. 애플과 엔비디아, AMD와 퀄컴 등 세계 주요 기업들이 모두 TSMC의 생산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 AI 산업은 사실상 TSMC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대만의 가장 큰 변수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대만해협에서 충돌이 발생하면 세계 공급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이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가 커진다. 세계는 더 이상 특정 지역에만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반도체 부활을 꿈꾸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절대 강자였다. 도시바와 NEC, 히타치와 후지쓰는 세계 시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주도권을 잃었다.
최근 일본은 국가 차원의 반도체 부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와 정밀 장비 상당수가 일본 기업에서 나온다.
문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다. 또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기업 문화 역시 혁신 속도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일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다. 특히 소재·장비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이다.
대한민국의 기회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 부품인 HBM 시장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AI가 발전할수록 메모리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AI는 기억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은 아직 반도체 강국이지 AI 강국은 아니다. 우리는 하드웨어에서는 강하지만 플랫폼에서는 약하다. 우리는 제조에서는 강하지만 소프트웨어에서는 부족하다.
우리는 기술에서는 강하지만 글로벌 생태계에서는 더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하다. 반도체 강국에서 AI 강국으로 진화해야 한다.
피지컬 AI 시대,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
향후 20년의 핵심 키워드는 피지컬 AI다. AI가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시대는 끝나고 있다. AI는 이제 로봇이 되고 자동차가 되며 공장이 되고 물류센터가 된다. 드론이 되고 스마트 농기계가 되며 인간의 손과 발을 대신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자동차와 조선, 기계와 배터리, 반도체와 통신 산업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산업 구조다.
따라서 피지컬 AI 시대에는 한국이 새로운 선도 국가로 도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특히 제조업의 AI 전환(AX)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과제다. 조선과 자동차,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에 AI를 결합해야 한다. 공장 자동화와 다크팩토리, 로봇 기반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세계 시장에 수출해야 한다.
제2건국 선언
지금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국가적 비전이 필요하다. 1960년대 산업화는 제1의 기적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는 제2의 기적이었다. 1990년대 정보화는 제3의 기적이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제4의 기적, AI 국가 대전환에 도전해야 한다.
정부는 AI를 국가 최우선 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 기업은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대학은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를 길러야 한다. 연구소는 원천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정치권은 정쟁을 멈추고 국가 전략에 협력해야 한다. 기업은 미래 경쟁력을 위해 새로운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성공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앞으로 10년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할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AI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국가 생존 전략이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AI 패권 경쟁은 향후 100년 세계 질서를 결정할 문명 경쟁이다.대한민국은 그 경쟁을 구경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직접 참여해 세계 AI 3강의 한 축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서바이벌 마인드를 넘어 그레이트 마인드로 나아가야 한다.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기술을 수입하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 표준을 만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AI와 반도체, 로봇과 우주산업, 바이오와 에너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문명 국가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늘 준비된 국가의 편이었다.산업혁명도 그랬고 정보혁명도 그랬다. AI 혁명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어쩌면 진짜 대한민국의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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