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중국 산서성 대동(大同)지방에는 기둥 몇 개에 의지하여 절벽에 매달리다시피 달려있는 사찰로 유명한 현공사(懸空寺 懸: 매달릴 현)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바위 끝자락에 기둥을 세우고 공중에 매단 것 같은 건축기술을 금강산 보덕굴에서 만날 수 있다. 가야산 희랑대도 옛 모습은 절벽에 세운 기둥 몇 개에 의지한 건물이었다.
해인사 희랑대(希朗臺)는 생긴 터가 게(蟹 바닷게 해)모양이라고 했다. 즉 한 명만 살 수 있는 좁은 공간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게는 두 마리만 모이면 집게 발을 세우고서 싸우기 때문이다. 희랑대는 이름 그대로 희랑대사께서 혼자 살았다. 어느 날 큰절인 해인사의 많은 대중들이 모기 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음에 내려가서 모든 모기를 집합시킨 후 희랑대로 데리고 왔다. 그 뒤부터 큰절에는 모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중들은 물릴 걱정없이 여름을 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희랑대사 혼자서 그 많은 모기에게 피를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이 현재 남아있는 희랑대사의 앉아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좌상(坐像)의 가슴 가운데 남아있는 구멍이라고 한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뒷담화겠지만 나름 설득력을 가진다. 희랑대에는 십여년 해인사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진품과 동일한 모습으로 정성스럽게 다시 만든 좌상을 인법당에 모셨다.
희랑(希朗 889~956)대사는 천년 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에 걸맞게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해인사고적기》에는 “왕건과 희랑이 처음 만났다.”고 했으며〈균여전〉에는 “희랑대사가 왕건을 도왔다”고 하여 두 인물이 고려를 건국할 때 정치적 종교적 역할을 일정부분 분담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선중기 유척기(1691~1767)선비는《지수재집》‘유가야기(遊加耶記)’에서 “고려왕실이 949년 5월 희랑대사에게 시호와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내릴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의 대가라는 무형의 사상적 자산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유형의 ‘희랑대사 건칠(乾漆 옻칠)좌상’ 때문일 것이다. 10세기 초반 조성한 높이 82cm의 승려상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입체 인물상이다. 그 희귀성과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아 1989년 보물 999호 지정되었다가 2020년 국보 333호로 승격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999호 333호도 예사롭지 않는 숫자라 하겠다. 참고로 2021년 11월19일부터 국보 보물에 대한 숫자기록은 외부적으로는 표기하지 않는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선생은 《청장관전서》‘가야산기(記)’에서 대사의 좌상을 친견한 소감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얼굴과 손을 까맣게 칠했고(옻칠 상태라는 의미)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 나왔다(조각기술이 세밀하다는 뜻). ··· 가슴 가운데 구멍이 있다.”
그 구멍 때문에 흉혈국인(胸穴國人 胸가슴 흉. 穴구멍 혈)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폭 0.5cm 깊이 3.5cm 구멍은 종교적으로는 신통력을 상징한다. 광명의 빛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역 출신으로 중국불교의 기초를 세운 불도징(232~348) 역시 흉혈의 소유자였다. “밤에 독서할 때 가슴의 구멍을 막아두었던 솜을 빼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한 것에서 그 사실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왕건(877~943)임금과 희랑대사의 만남은 두고 두고 이야기거리를 제공했다. 1992년 10월 고려 태조릉인 현릉(顯陵) 북쪽에서 왕건의 청동상이 발굴되었다. 원래 왕실 상징물로 개성의 원찰 봉은사(奉恩寺)에 초상화와 청동상을 봉안했다. 하지만 조선을 건국하면서 새 왕조는 보존 혹은 폐기를 두고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없앨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둔다면 조선왕조의 정체성 확립에 방해가 될 것이며, 없애버린다면 민심이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왕릉 근처에 묻었다’고 했다. 성군답게 보존도 폐기도 아닌 나름의 중도적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 덕분에 2006년 남북교류특별전 때 왕건 청동상은 서울나들이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고려전’을 기획했다. 희랑 좌상도 천년 만에 서울로 외출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왕건 청동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지 못했다. 천년 만의 해후를 기대했지만 결국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대신 경기도 연천 숭의전(고려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곳) 사당에서 왕건 초상화와 희랑 좌상의 상봉 의례를 통하여 그 서운함을 달랬다.
설 연휴를 이용하여 희랑대사 탄신지를 찾았다. 경남 거창군 주상(主尙)면 성기리 희동 마을의 주(朱)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 때 인근 합천 해인사로 출가했다. 성기리(聖基里)는 성인마을이라는 뜻이며 희동(希洞)은 희랑대사의 동네라는 의미가 되겠다. 주상면 행정복지센터(면사무소) 앞에 ‘왕사(王師 태조왕건의 스승)의 고장 주상’이라는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도로명은 희랑길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가니 희동 입구에 안내판과 함께 ‘희랑대사 탄신 유지(遺址)’라고 쓴 비석이 반겨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기리 뒷산의 ‘주(朱)부처님’을 모신 사당인 성인당(聖人堂)에서 매년 2월9일 후손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향과 핏줄이 주는 지연(地緣)과 혈연의 무게감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역(不可逆 바꿀 수 없는)적 인연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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