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 컬럼] AI 신대륙의 문을 여는 법 ― 규제 완화에서 공공 수요까지

“AI 신대륙은 소수의 탐험가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AI 정책은 늘 거창한 비전으로 시작했지만, 정작 시장의 문턱 앞에서는 멈춰 서곤 했다. 그래서 이번 정부의 AI 전략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무엇을 약속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부터 실제로 바꾸기 시작했느냐다.
 

그 점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내놓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는 AI를 미래 담론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공공조달, 인증, 데이터, 정부 스스로의 사용 방식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지점을 먼저 건드렸다. AI 신대륙을 말하면서, 탐험담이 아니라 정착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접근은 국제적으로도 검증된 경로다. 미국 정부는 이미 AI 산업을 키우는 핵심 수단으로 공공조달을 활용해 왔다. 국방부와 정보기관, 연방정부 조달 시장은 AI 스타트업의 최대 고객이자 시험장이었다. 팔란티어와 안두릴 같은 기업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가 먼저 쓰고, 시장이 따라온다”는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기술의 우수성은 민간에서 검증받되, 초기 수요는 공공이 책임지는 구조다.
 

유럽연합(EU)은 다른 길을 택했지만, 역시 공공의 역할을 핵심에 둔다. EU는 AI를 전면 규제하기에 앞서 공공 부문 도입과 표준 설계를 병행해 왔다. 각국 정부와 공공기관이 의료·행정·교통 분야에서 AI를 직접 활용하며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민간 시장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정부가 쓰지 않는 기술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다”는 인식은 분명하다.
 

중국의 선택은 더욱 노골적이다. 중국 정부는 AI를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지방정부와 공공기관을 총동원해 수요를 만들어왔다. 스마트시티, 공공안전, 행정 자동화 프로젝트는 사실상 거대한 국가 주도 AI 조달 시장이었다. 기술 기업의 성장은 철저히 공공 수요 위에서 이뤄졌다.
 

이 세 사례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교훈은 하나다. AI 신대륙은 기술 경쟁이 아니라, 누가 먼저 ‘첫 시장’을 만들어주느냐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구 부총리가 공공조달을 AI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제품에 대해 공공조달 시장 진입 요건을 완화하고, 입찰과 계약 과정에서 가점과 우대 조건을 부여하겠다는 결정은 분명한 방향 전환이다. 납품 실적 3000만 원 요건과 다수공급자계약(MAS)에서 요구되던 신용평가등급 확인 요건을 면제하겠다는 방침은, 그동안 혁신 기업의 발목을 잡아온 초기 진입 장벽을 정부가 직접 걷어낸 것이다.
 

KS 인증제도 개편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60년간 유지돼 온 공장 중심·제조업자 중심 인증 체계를 손보겠다는 결정은 한국 산업 정책의 오래된 관성을 건드린다. 공장이 없어도, 설계자와 기술 개발자도 KS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은 AI·소프트웨어 시대에 맞는 산업국가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선택이다. 미국과 유럽이 이미 표준과 설계 중심 인증으로 이동한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여기에 공공 부문 AX(인공지능 전환)를 전면에 내세운 점은 정책의 완성도를 높인다. 33개 부처·청·위원회가 2조4000억 원을 투입해 전 분야 AX를 추진하고, GPU·AI 모델·데이터셋·검증·자문단까지 묶은 전주기 지원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을 전제로 한 설계다. 정부가 AI를 쓰지 않으면, 민간의 확산도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공공저작물 개방 정책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이다. AI 학습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제0유형’을 신설하고, AI 학습 목적 전용 유형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은 데이터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신호다. AI 신대륙의 토양을 민간에만 맡기지 않겠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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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노트북LM]

이 모든 정책은 하나의 인식으로 수렴된다. AI는 규제로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공공이 먼저 키워야 할 성장 공간이라는 판단이다.
 

AI 신대륙은 이미 발견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은 기술을 보유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정착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느냐다. 미국, 유럽, 중국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증명한 길 위에, 한국도 이제 본격적으로 올라섰다. 구 부총리가 선택한 공공조달과 제도 개편이라는 출발점은 결코 늦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속도와 지속성이다.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국가는 문지기가 아니라, AI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여는 안내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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