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건배사는 대개 무난하다. 감사 인사, 덕담, 상투적인 협력의 언어가 오간다. 그래서 건배사는 대개 기사 가치가 없다. 행사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의례일 뿐, 정치인의 속내가 드러나는 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 11일 어제, '제31회 장한 고대 언론인상 시상식'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 건배사는 달랐다. 의례를 벗어났고, 준비된 수사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언론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언론에 대한 인식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냈다. 오 시장은 자신을 "서울시장이지만 언론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겸손의 수사가 아니다. 정치인이 흔히 쓰는 '언론과의 소통'이라는 표현과도 다르다. 그의 말에는 행정의 중심에 언론이 놓여 있다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하루의 모든 업무가 언론 보도와 함께 돌아간다는 말, 자신이 하는 정책 하나하나가 서울시 내부 문서가 아니라 언론을 통해 시민에게 전달된다는 자각. 이 말 속에는 권력이 스스로를 완결된 존재로 보지 않는 태도가 담겨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이것이다. 그는 언론을 "두려움과 존경심으로 대한다"고 했다. 정치인의 언어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정치는 본래 강한 언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언론을 관리의 대상으로 여긴다. 우호적 매체와 비우호적 매체를 나누고, 질문을 예측하고, 발언을 계산한다. 언론은 넘어서야 할 산이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 취급된다. 그래서 정치인의 언어에는 항상 방어와 통제가 먼저 깔린다.
그러나 오 시장의 표현은 달랐다. 그는 언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먼저 놓았다. 이 말은, 언론이 자신을 평가할 권한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그 평가 앞에서 권력이 스스로를 숨기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약함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두려움은 권력이 시민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존경은 그 다음에 온다. 감시와 비판, 기록과 질문이라는 언론의 본령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존경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 시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보고를 받을 때도 언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단순한 홍보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을 행정 내부의 논리로만 설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시민의 눈높이, 언론의 질문, 공개된 검증을 정책 판단의 기준선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오 시장의 언론관은 기존 정치인들과 확연히 갈린다. 그는 언론을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책을 검증하는 장치'로 인식하고 있다.정책이 언론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은가를 묻는다는 말은, 결국 시민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어제 오 시장의 건배사에는 이 오래된 민주주의의 문장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준비된 연설문이 아니었기에 더 솔직했고, 첫 참석한 자리였기에 의미가 더 컸다. 정치적 계산이 앞섰다면 무난한 감사 인사로 끝냈을 자리에서, 그는 굳이 언론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말과 현실은 다를 수 있다. 그의 언론 철학이 서울시의 홍보 시스템과 대언론 실무에 얼마나 일관되게 구현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평가의 대상이다.
언론관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으로 완성된다. 말이 높을수록 현장의 기준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의 말은 공적 기록이다. 그리고 때로는 한 문장의 인식이 한 시대의 정치 문법을 가른다. "언론을 두려워한다"고 말한 정치인. 이 말은 언론을 적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시민 앞에 숨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권력이 언론을 존중한다는 말은 많았지만, 언론을 두려워한다고 말한 장면은 드물었다.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이 건배사는 충분한 타산지석이 된다. 언론을 이기려 들수록 정치는 작아지고, 언론 앞에 설 준비를 할수록 정치는 단단해진다. 정치는 결국 기록으로 남는다. 그 기록의 문을 여는 열쇠가 언론이라면, 그 문 앞에서 겸손해질 줄 아는 정치인만이 시간의 심판을 견딜 수 있다. 어제의 건배사는 술잔을 든 인사말이 아니라, 권력과 언론 사이에 놓인 하나의 언론 철학의 선언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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