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디지털 장의사'의 진화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그 옛날 아날로그 시절, 윗옷 안주머니에 담긴 두툼한 노란색 월급봉투는 아버지의 권위였다. 그 봉투를 노리는 소매치기들도 그 시절이 호시절이었다. 월급이 급여통장에 온라인으로 입금되면서부터 아버지의 권위와 소매치기들의 전성기도 종말을 고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톰(Atom)’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세계에서 ‘비트(bit)’로 구성되는 디지털 시대로 변화하였음을 실감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은 할 것도, 배울 것도 많다. 옛날에는 ‘타이피스트(typist)’라는 타이핑만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있었다. 영화를 보면 “미스 김, 타이핑 부탁해!”, 이런 영화 대사를 가끔 듣는다. 요즘에도 타이핑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까? 운전기사도 괜찮은 직업 중 하나였다. 운전기사 선생님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웬만하면 컴퓨터를 켜고 문서를 작성하고 운전도 할 줄 안다.
 
디지털 전환은 범죄의 형태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 대면 접촉에서 이루어진 범죄는 이제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생성형 AI까지 더해지며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모방해서 속이는 수법이 쉽사리 구현된다. 그 결과 금융 사기, 보이스 피싱, 디지털 성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전문 범죄 조직뿐 아니라 일반인도 다크웹을 통해 범죄 도구를 구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었다. 디지털 범죄로 인한 피해는 자산을 넘어 개인의 존재와 생존마저 위협한다. 특히 청소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을 안고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들이라 디지털에 익숙한 만큼 그만큼 반대급부로 디지털 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의 법과 제도, 수사 역량은 여전히 디지털과 AI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뒤를 쫓는 중이다. 디지털 시대의 범죄는 더 교묘하고 대규모이며 더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옛날에는 지갑을 잃으면 ‘돈’을 잃는 거였지만 지금은 온라인에서 털리면 인생 자체가 로그아웃되어 버린다. 그만큼 무섭다. 따라서 사회 전반이 경각심을 가지고 디지털 기술과 법 그리고 교육이 동시에 대응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할 때이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여기서 면장은 면사무소의 면장(面長)이 아니라 담장(墻)을 마주(面)하기를 면(免)한다는 의미인 ‘면면장(免面牆)’에서 비롯되었다. 디지털을 알면 디지털 범죄를 당하지 않는다.
 
이제는 범죄가 주택가 담을 넘거나 지하철에서 승객을 대상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수준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온라인의 영역에서 자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남아, 특히 캄보디아는 온라인 사기,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랜섬웨어, 인신매매가 결합된 사이버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값싼 노동력과 규제 공백을 이용해 캄보디아가 국제 사이버 범죄의 무대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며칠 전 보도에 의하면 국제 사이버 범죄자들이 대대적인 단속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피했다고 한다. 온라인사업이 오프라인, 즉 현실의 매장이나 사업체를 겸할 때 시너지효과가 있듯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온라인상의 범죄가 감금, 폭행, 인신매매 등 오프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범죄와 결합될 때에 역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그 무서움을 더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SNS 계정, 구독 서비스, 금융 기록,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까지. 하지만 죽음 이후 이 모든 데이터는 어떻게 처리될까? 이 고민에 답하기 위해 등장한 직업 내지 자격증이 디지털 장의사이다. 초기 디지털 장의사의 주요 업무는 고인의 계정 삭제, 사진과 문서 복구, 개인정보 보호 등 사후의 온라인 공간 정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삶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며 고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디지털 장의사의 역할은 디지털적인 삶의 관리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온라인에서의 평판이 곧 ‘사회적 신뢰’로 연결되는 시대가 되면서 온라인 평판 관리 서비스가 새로운 핵심 영역으로 부상했다. 디지털 장의사는 단순히 사망 이후 기록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의 부정적 게시물을 법적 또는 기술적으로 대응하거나 검색 결과를 개선하는 등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는 디지털 장의사가 더 이상 죽음 이후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디지털 자산을 보호하는 전문가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디지털 장의사’라는 이름에서 ‘장의’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느낌 때문에 거부감을 가진다. 그러나 디지털 장의사의 업역을 확장하여 ‘온라인 평판 관리’라고 부르며 인식이 달라졌다. 디지털 정보의 보호, 디지털 자산관리라는 새로운 의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디지털 장의사는 민간 자격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계정 보안, 악성 링크·피싱 수법 분석, 온라인 데이터 복구·삭제·검색 및 평판 관리, 법·정책에 대한 지식을 구비하여야 한다. 따라서 디지털 장의사는 단순히 게시물을 삭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사람이 공격받지 않도록 지키는 능력, 즉 ‘디지털 버전’의 호신술을 구비하여 전파한다. 필자도 일찌감치 디지털 장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디지털 호신술을 익힌 셈이다. 전통사회에서 호신술은 몸을 지키는 기술이었다. 오늘날 디지털 호신술은 온라인에서의 공격을 막아 우리의 삶 전체를 지키는 기술이다. 누구든지 원한다면 휴대폰을 개통하고, 컴퓨터를 사고,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들고 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법만 배웠지 그 속에서 속지 않고, 범죄를 피해 가는, 살아남는 법은 구체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의 안전은 준비된 시민에게만 주어진다. 사기범들은 항상 한발 앞서 있다. 피해 후 학습하는 또는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 비싸다. 우리는 더 이상 “설마 나에게”라고 말할 여유가 없다. 사기를 당하고 깨닫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할 시대이다. 그것이 디지털 사회를 버티게 하는 생존 훈련이며, 새로운 온라인상의 호신술이다.
 
모두가 디지털 장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내 정보와 평판을 지키는 디지털 호신술은 갖추어야 한다. 삶의 기록이 온라인에 저장되는 시대에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그 기록이 언젠가 나를 배신할지 모른다. 이제는 한번 털리면 지갑이 아닌 나의 정체성이 털리는 시대이다. 온라인 생존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역량이다. 이제 디지털 호신술에 관심을 가지자!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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