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의 피해 현장에서 ‘가족을 지키려던 행위’가 살인으로 이어졌다면 정당방위로 볼 수 있을까. 대법원이 최근 “폭력적 부친을 제지하다 살인을 저지른 아들”에게 징역 6년을 확정하면서, 방어의 한계선을 다시 그었다. 법원은 가정폭력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위험이 해소된 뒤 이어진 폭력은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폭력 가정 내에서 발생한 살인의 법적 성격, 그리고 정당방위의 성립 범위를 둘러싼 논란을 다시 환기시켰다.
폭력 아버지를 제지하다 벌어진 비극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최근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A씨(33)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건은 2017년 10월 필리핀 마닐라 인근 자택에서 벌어졌다. 당시 한식당 개업을 준비하던 부친은 공사 지연 문제로 가족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딸(A씨의 여동생)을 폭행하고 아내에게 흉기를 들이밀며 위협했다.
이를 본 A씨는 부친을 제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 팔에 상처를 입고, 프라이팬으로 부친의 머리를 내리친 뒤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1심은 “아버지가 가족을 위협하던 폭력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라 해도, 살인이라는 결과가 너무 무겁다”며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형량을 징역 6년으로 낮췄다. 재판부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피고인이 극도의 당황과 공포 속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범행 후 깊이 반성하고, 유족인 어머니와 여동생이 선처를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A씨 측이 주장한 ‘정당방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이미 방으로 피신해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A씨가 공격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위험이 일단 해소된 후 가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사회통념상 방어의 범위를 넘어선다”며 원심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정당방위는 어디까지인가”
이번 사건의 법리적 쟁점은 명확하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이 어느 시점까지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는가’다.
형법 제21조는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를 정당방위로 규정한다. 핵심은 ‘현재의 침해’와 ‘상당한 방위행위’다. 즉, 위험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여야 위법성이 조각된다.
법원은 A씨가 부친을 제압한 시점 이후에도 폭력을 이어간 점에 주목했다. 피고인이 공포와 분노 속에서 감정적으로 폭발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방어의 필요성이 사라진 뒤의 행위’는 형법상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즉각적인 방어’는 허용되지만 ‘사후적 응징’은 위법이라는 원칙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법원은 A씨가 “부친의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 이후에도 살해행위를 지속한 점”을 근거로 들며, 정당방위 요건 불충족을 확인했다.
방어권 인정의 한계, 공감의 여지는 있다
재판부는 단호한 법리적 판단과 함께 ‘인간적 참작 사유’도 함께 고려했다. 항소심은 A씨가 장기간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점, 순간적 공포와 격분 속에 범행이 발생한 점, 그리고 유족이 모두 피고인의 선처를 호소한 점을 참작해 형을 감경했다.
이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압박’이 범행 동기에 미치는 영향을 일정 부분 인정한 결과다. 최근 법원은 가정폭력 피해자 혹은 피해 가족이 가해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에서, ‘심리적 위기 상황’을 양형 사유로 고려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번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A씨의 행위를 “반복된 폭력과 위협 속에서의 우발적 범행”으로 평가하며, 교정 가능성을 열어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정당방위의 요건을 엄격히 재확인하면서도, 가정폭력 피해자의 현실에 대한 사법적 공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즉각적이고 불가피한 위협 상황’이어야 한다는 법리적 원칙을 재확인한 동시에, 양형 단계에서는 인간적 사정을 감안했다.
결국 법원은 ‘정당방위와 과잉대응’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은 셈이다. 가족을 보호하려는 동기와 공포가 범죄의 배경이 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살인의 정당성’이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사회적 장치가 얼마나 부족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형사법의 잣대가 정당방위와 감형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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