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전 국회의원]
우여곡절 끝에 상법 제382조의3, 이사충실의무 조항이 개정되었다. 1998년 12월 28일 상법에 이사충실의무가 도입된 이후, 이름뿐이던 규정이 이번 개정을 통해 실질적인 내용을 갖춘 조항으로 거듭났다. 개정된 상법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 및 주주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명시하며, 나아가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문구를 통해 이사충실의무의 대상을 명확히 주주까지 확대하였다. 이는 1998년 도입 당시의 본래 취지를 되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이사충실의무가 상법에 도입된 배경은 IMF 외환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위기의 원인은 대기업의 수익성을 무시한 과잉투자와 금융권 부실에 있었으며, 이는 지배주주와 그를 대리한 경영자(이사)의 독단적 의사결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IMF의 권고에 따라 정부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마련했고, 주주제안권, 집중투표제, 소액주주 보호, 주식분할, 업무집행책임자 제도 등 영미법적 기업지배구조 장치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2004년 대법원은 이사충실의무의 수범 대상을 "회사"로 한정하고 "주주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이사는 주식회사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이지, 주주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아니며,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를 부담할 뿐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상법 제382조의 2와 민법 제680조가 회사와 이사의 위임관계, 그리고 민법 제 681조가 수임자, 즉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선관주의”)를 규정한 것에 더해 이사충실의무를 신설한 것은 지배주주의 일방적 의사결정을 감시하는 특별한 의무를 부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1970년 판결을 수용한 것으로, 당시 우리 상법과 민법이 일본의 법제와 유사한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충실의무는 본래 영미법상 'Duty of Loyalty', 즉 경영자가 충실하게 회사와 주주를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원칙이다. 따라서 이사충실의무 조항을 새롭게 명문화한 이번 개정은 이러한 충성의무 개념을 상법에 온전히 반영한 것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LG화학의 물적분할과 LG에너지솔루션 상장, SK이노베이션의 이차전지 부문 분할 및 상장 사례에서 보듯, 지배주주 주도의 자본거래에서 이사의 책임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사회 결의만으로 지배주주의 이익을 중심으로 일반주주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충실의무 조항이 주주에 대한 의무로 명확히 해석되지 않으면 자본시장의 신뢰가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번 개정의 추진 배경이자 동력이었다.
이번 개정 과정에서는 충실의무 조항 외에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여러 제도들이 함께 논의되었다. 일부는 입법에 반영되었지만,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증원, 자기주식(자사주) 의무소각 원칙 복원 등은 끝내 법제화되지 못하고 향후 과제로 남았다.
이번 개정에서는 감사위원 선임 시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산하여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조항이 명시되었으나, 감사위원 수 증대나 분리선출 의무화는 반영되지 못했다. 독립성과 대표성이 요구되는 감사위원회의 실질적 기능 강화를 위해 향후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
한편 재계는 충실의무 개정이 “이사회의 투자 결정 의욕이 꺾이고, 경영이 위축되어 경제에 부담이 된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반주주의 이익을 지배주주에게 부당 이전하는 결정을 막으면 기업 투자가 위축된다”는 논리로, 결국 일반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관행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기업의 투자 결정은 본래 다양한 주주의 이해를 반영하고 설득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 과정을 생략해야만 투자가 가능하다는 인식은 지배주주의 전횡을 고착화할 뿐이다. IMF 위기가 견제받지 않는 지배주주의 독단적 의사결정에서 온 것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1998년 상법이 개정된 것 아닌가? 재계의 논리는 또다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상법 개정이 1998년 상법 개정의 의미를 정확히 살린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재계는 또한 이번 개정이 주주들의 소송 남발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충실의무는 주주 간 이해상충이 있는 의사결정에만 적용되며, 모든 주주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인 경영판단은 여전히 면책된다. 주주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증자, M&A 등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이사충실의무의 소송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최근 18개월간 합쳐서 28회 이사회가 개최되었고, 총 91개 안건 중 단지 4개가 충실의무 적용 대상이었다. 대법원도 합리적인 절차와 정보수집, 신의성실한 판단에 따른 경영상 결정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판례를 확립하고 있다. 재계의 주장은 사실상 이미 존재하는 면책 원칙을 반복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충실의무 개정은 오히려 경영판단원칙과 충실의무의 구별을 명확히 했으며, 향후 독립위원회의 결정과 일반주주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경영판단원칙을 충실의무에도 예외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상법 개정 논의에서 자기주식(자사주) 의무 소각 원칙의 부활도 주요 쟁점이었다. 원래 상법은 자본충실의 원칙상 회사가 자사주를 취득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고, 부득이 취득한 자사주도 지체 없이 처분하거나 소각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기업이 자사주를 장기간 보유하면서 사실상의 자본감소 효과를 내거나, 주주가 출자한 자본을 임의로 환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2011년 이명박 정부의 상법 개정으로 이러한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다. 2006년 법무부가 마련했던 입법예고안에는 자기주식 처분 시 기존 주주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하는 조항이 담겼으나, 재계의 반발로 최종안에서 삭제되어 개정된 것이다. 배당가능이익 한도 내에서 자사주 취득이 자유화되었고, 취득한 자사주를 계속 보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익소각 제도까지 폐지되었다. 이후 자본시장법도 이에 맞춰 개정되어 상장회사의 자사주 보유가 법적으로 용인되면서, 기업들은 자사주를 사실상 경영권 방어 수단 또는 분할 합병 시 지배주주에제 유리하게 자사주를 활용하는 “자사주의 마법”이 등장한 것이다. 지배주주 일가의 승계를 위해 인적·물적 분할을 한 뒤 남은 자사주를 이용해 지배력을 유지하거나, 경영권 분쟁 시 자사주를 제3자에게 처분하여 그 주식의 의결권을 부활시키는 등 이른바 '자사주 마법'이 성행했다. 이런 행태는 일반주주의 지분가치를 희석시키고 지배주주의 불투명한 지배력 승계를 돕는 부작용을 낳았다. 따라서 자사주 매입자금은 회사의 돈, 나아가 총주주의 것인데 이를 일부 주주의 것으로 이전하거나 경영권 방어의 수단으로 쓰는 것은 이사충실의무와 충돌하는 것이 된다.
또 다른 과제는 배임죄의 민사화와 이를 뒷받침할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이다. 배임죄란 기업 경영자가 자신의 이익 등을 위해 회사나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면 적용될 수 있는 형법상 범죄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배임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징역형이나 벌금형)을 해왔고, 민사적으로는 회사나 주주가 그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이중 구조로 운영되어 왔다. 특히 기업 경영 관련 배임의 경우 경영 판단의 영역과 겹치면서, 기업경영의 자유 보장과 이해관계자 보호 간 균형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재계는 이번 충실의무 조항 개정에 반대하면서, 한국에서만 배임(충실의무 위반)을 형사범으로 처벌하는 것은 과도하다며 “배임은 민사적으로만 규율하자”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실제 미국·영국 등 영미법계에서는 경영자의 신인의무 위반을 민사소송으로 다룰 뿐 형사소추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해상충에 따른 손해는 경제적 제재로 해결하는 편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민사소송만으로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특히 거대 기업의 내부 사정을 소액주주 원고가 입증하기란 매우 힘들다. 지금까지는 증거개시 절차가 없다 보니, 검찰 수사에 의존하는 우회로가 동원되어 왔다. 즉, 피해 주주가 직접 민사소송으로 입증을 못하니, 검찰에 배임 혐의로 고소하여 강제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형사재판 과정에서 나온 증거를 가지고 다시 민사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식이었다. 검찰이 소추하지 않으면 민사구제도 어려워지는 탓에, 오히려 기업 내부 분쟁에 형사 고소가 악용되거나 (주주-경영진 갈등에서 배임죄 고소 남발), 기업 임원들이 형사 리스크 부담으로 위축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배임의 민사화를 추진하려면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소송 당사자가 재판 전에 상대방이 가진 증거를 공개받는 절차로 소송당사자가 상대방의 증언 녹취를 통해 서로 재판의 증거로 활용할 수도 있다. 디스커버리는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공판중심주의가 정착되고 있는 것과 함께 민사에서 증거주의와 신속한 피해구제를 위한 사법 개혁 조치 중 하나다. 대한변협,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꾸준히 주장해왔고, 조희대 대법원장도 2024년 신년사에서“증거의 구조적 불균형이 불공정한 재판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증거수집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혀 디스커버리제도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번 상법 개정은 단지 하나의 조항을 고친 것이 아니라, 기업지배구조의 중심축을 지배주주 중심에서 모든 주주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구조적 변화의 출발점이다. 회사는 주주의 것이며, 이사는 그 권한을 위임받은 자로서 모든 주주를 위해 충실하게 의무를 다해야 한다. 주요 경영 결정은 주주가치에 대한 기여 여부를 중심으로 정당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상장회사의 기본 책무이다.
기업지배구조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제 시작되었다. 상법에 명확히 새겨진 주주에 대한 이사의 의무는 헌법상 원칙처럼, 향후 자본시장법과 기타 기업 관련 법제의 개정을 이끄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자사주 규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감사위원회 제도 보완 등 남은 과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한국 기업들이 모든 주주의 이익을 존중하는 책임 있는 경영을 실현하고,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우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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