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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3] 상도(上都)는 왜 폐허로 남았나?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11-13 15:58수정 : 2017-11-13 15:58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열락(悅樂)의 궁전 상도(上都)
"쿠빌라이 칸은 상도(자나두)에
장엄한 열락의 궁전을 지으라 명 했네
그 곳에는 성스러운 강 금련천(알프)이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동굴을 지나
태양이 비치지 않는 바다로 흘렀노라.
구불거리는 시냇물로 반짝이는 정원들이 있었고
그 곳에는 향기를 지닌 많은 나무들이 꽃을 피웠네.
또 여기에는 언덕만큼이나 오래된 숲들이
햇빛이 비치는 녹지를 에워쌌구나."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콜리지가 쿠빌라이 칸이라는 시에서 그려낸 대원제국의 여름 수도 상도(上都)의 모습이다.

▶ 오지에 남은 번영의 도시
콜리지가 상상력을 동원해 환상적으로 그려낸 상도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월이 역사의 흔적을 많이 지워 놓았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때 그 자리에 있을까? 아니면 그때의 것이 거의 사라지고 흔적 정도만 남아 있을까? 현지를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은 후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방문해 보니 상도는 흔적만 남아 있는 폐허였다.
 

[사진 = 상도 유적 성곽]

몽골제국을 새롭게 개조한 쿠빌라이가 꿈을 이루는 발판이 됐던 곳, 대원제국의 여름 수도로서 당시 세계인들의 선망의 도시가 됐던 곳, 과거의 이 초원 도시는 지금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오지로 남아 바깥세상에는 그 모습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 일곱 개의 호수 돌룬노르

[사진 = 중국 승덕(열하) ]

베이징에서 내몽골 쪽으로 자동차로 세 시간 가량 가면 과거 청나라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었던 승덕(承德:)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때문에 열하(熱河)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사진 = 승덕 영우사 사리탑]

이 승덕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선 뒤 특히 건륭제가 공을 들인 티베트 불교의 도시로 자주 언급될 곳이다. 여기서 여섯 시간 정도 비교적 험한 길을 더 가면 과거 쿠빌라이의 상도가 있었던 돌룬 노르가 나온다. 몽골어로 돌룬 노르라고 불렀던 그 곳은 지금은 옛 이름의 음을 따와 돌룬(多倫)이라 부르고 있다.

상도가 자리했던 금련천 초원은 이 돌룬이란 소도시에서 30 ㎞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원 상도 유적지’(元 上都 遺蹟地)라고 쓴 조그마한 입간판을 지나 1Km 정도 들어가자 상도의 옛 성터가 나타났다. 상도는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터만 보일 뿐 거의 눈에 띠는 것이 거의 없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사진 = 다륜(돌룬노르) 시가지]

'열락(悅樂)의 궁전'도 '반짝이는 정원'도 '향기 나는 나무'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잡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들판에 석양빛이 비켜 내리면서 주변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독초가 늘려 있는 원 상도 유적지(元 上都 遺蹟地)

[사진 = 폐허가 된 상도성터]

예전에 성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둑의 잡풀 사이로 이곳이 옛 상도의 성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은 세워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는 듯 모양도 선명하고 ‘원 상도 유적지’라고 새겨진 글씨도 선명했다. 비석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낮은 철조망을 손으로 잡고 넘어서는 순간 손목 주변이 화끈해진다. 철조망 사이사이에 나 있는 독초에 쏘인 것이다. 금새 독초에 쏘인 곳이 따끔거리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곳곳에 독초들이 늘려 있었다.

▶ 카라코롬과 같은 폐허

[사진 = 무너진 상도 성곽]

폐허로 남아 찾는 사람에게 안겨주는 황량함이나 지천에 늘려 있는 독초들 그리고 길게 쳐져 있는 철조망...상도가 주는 느낌은 남겨진 모습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몽골 땅에 폐허로 남아 있는 카라코룸이 주는 느낌과 거의 흡사했다. 그 동안 철저한 파괴과정을 거치는 동안 외성과 내성을 둘러싼 성곽은 언덕이나 허물어진 담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진 = 성터안의 가축들]

궁궐이 있었을 것 같은 자리에는 잡풀과 독초들만 무성했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희미한 집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무너져 내린 성벽의 잔해라도 남아 있어서 청나라 지배 당시 철저히 파괴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카라코룸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외성의 바깥으로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사람의 출입을 막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그 것은 형식뿐 실제로는 사람들과 가축이 마음대로 들락거린 흔적이 역력했다. 실제로 성터 안에는 여러 마리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 빈약한 박물관, 초라한 관리

[사진 = 상도성 안내판 ]

상도성 입구에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도 유물박물관은 100평 전후의 방에다 몽골의 유물과 상도의 유물 그리고 몽골에 앞서 이 지역을 장악했던 금나라 유물 등을 모아 놓고 있었다. 유적지에서 파낸 자기와 항아리, 무늬가 새겨진 벽돌 등이 모아져 있기는 했지만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도시의 유물들로서는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도가 몽골인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한족이 세웠던 도시라면 역사의 현장을 이처럼 파괴된 채 내버려뒀을까? 아무래도 중국의 처사가 대국답지 않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쿠빌라이 야망 키운 금련천

[사진 = 금련천]

상도 박물관 앞쪽으로는 금련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폭 3-4미터 전후의 조그마한 개천인 금련천은 초원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행천(蛇行川)으로 수심이 얕았다. 흐르는 물이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은 화북지역에 댐을 건설하면서 유입량이 줄어 든 때문이라고 했다. 넓은 초원을 좌우로 휘저으며 구불구불 흘러온 금련천은 상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다가 초원 저편에서 다시 합쳐지고 있었다.
 

[사진 = 유적지 경고문]

금련천이 지나는 초원은 넓게 철조망이 쳐져 있고 철조망 군데군데에는 붉은 글씨로 유전(有電)이라고 적힌 팻말들이 붙어 있었다. 전기가 흐르고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팻말이었다. 금련화는 이미 지고 없었고 줄기들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가며 금련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무척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복원 시켜본 상도성(上都城)

[사진 = 상도성(그래픽 복원)]

금련천과 상도성터의 중간 지점에 언제 세워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낡은 안내판이 서 있었다. 페인트의 칠이 벗겨져 옛 상도성 안내도의 그림과 글씨를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안내도를 노트에 그려 들고 이전에 동쪽 외성이 있었을 법한 둑 위에 올라 상도의 옛 모습을 복원시켜 보았다.

▶ 세 겹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성

[사진 = 상도성 유적지]

상도는 원래 대칸이 머물던 궁전을 중심에 두고 사각형의 성벽이 세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그 동서남북 각 방향에는 문이 있었다. 남쪽에서 대칸의 궁궐로 들어가는 제일 안쪽의 문이 어천문(御天門)이었다. 그 바깥을 사각형으로 둘러싼 성벽에는 각 방향에 따라 동문과 서문, 남문, 북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바깥에도 역시 사각형의 외성이 쌓아졌다. 외성 밖 서남쪽에도 사각형으로 성을 쌓아 귀족들이 머무는 귀족청과 식당인 찬청(餐廳), 행정 관료들이 머물던 관리청 등이 설치해 놓았다. 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에는 공로(公路)가 지나가고 있었고 외성의 바깥쪽으로는 금련천이 성을 싸고돌며 흐르고 있었다.

▶ 마르코 폴로가 그린 상도

[사진 = 상도성 복원]

상도는 원나라의 여름 수도로 대칸은 6월부터 8월까지 통상 석 달 정도 여기에 머물렀다. 쿠빌라이 아래서 시종으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Mapk Polo)는 그의 책 ‘세계의 묘사’에서 상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차가노르(흰호수)에서 사흘거리를 가면 샨두(상도)라는 도시가 나온다. 그 곳은 바로 쿠빌라이 대칸이 있는 곳이다. 쿠빌라이 칸은 성내에 대리석을 사용한 석조로 훌륭한 궁전을 지었는데 수많은 홀과 방은 모두 금박을 입히고 새와 짐승, 꽃과 초목을 새겨 넣었다.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고 아름다움을 다한 장대한 건물이었다. 이 궁전으로부터 주위 16마일에 걸쳐 다른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는 샘물과 강 그리고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담으로 둘러싸인 궁원 중앙부에는 멋진 숲 속에 대나무로 만든 다른 궁전이 있다. 정자의 일종으로 기둥과 내부는 온통 금박으로 장식되고 기둥머리에는 거대한 용이 새겨져 있다. 칸은 한해에 6․7․8월 석 달 동안 이 궁전에서 보낸다. 여기에 있으면 선선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이 대나무 궁전은 칸이 머무는 동안 세워진 채로 놔두지만 부재중인 9개월간은 해체된다. 이렇게 세워진 건물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조립할 수도 헐 수도 있었다."

▶ 옛 것은 금련천만 그대로 남아

[사진 =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알현]

마르코 폴로가 언급한 대나무 궁전은 바로 유목민들이 지었다 헐었다 하는 이동 가옥 게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식을 화려한 도성을 지어 놓고도 쿠빌라이는 궁궐의 한쪽 편에 게르를 지어 놓고 그 곳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금박이 칠해진 화려한 석조 건물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외성의 일부 성터만 남아 있는 폐허의 자리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견주어 비교할 것은 금련천 이외는 없는 것 같았다.

▶ 초원과 대륙의 접합점에 잡은 거점

[사진 = 돌룬노르 가는 길 ]

이 지역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지금과 같은 초원지대는 점차 농경사회의 구릉지대로 바뀐다. 말하자면 상도가 들어섰던 돌룬노르는 몽골에서 이어져온 초원의 끝머리이자 중국대륙이 시작되는 첫머리가 되는 곳이었다. 쿠빌라이가 이 곳 초원의 끝머리를 자신의 본영으로 삼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몽골초원과 중국대륙을 연결하는 접합점을 거점으로 삼아 초원과 대륙을 자신의 품에 안는 야망을 실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초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곧바로 중국 땅으로 이어지는 이 돌룬노르의 금련천 초원이 쿠빌라이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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