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주식잡기(酒食雜記)] 이강제강(以强制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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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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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酒食雜記
 

    [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이강제강(以强制强)

고대 중국은 우리를 동이(東夷) 또는 예맥(濊貊)으로 불렀다. 모두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동이가 동쪽 오랑캐라면, 예맥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북방 오랑캐를 지칭한다.
오랑캐는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유대인이나 희랍인이나 로마인들이 자신을 제외한 변방 종족을 바바리안(Babarian)으로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중국인이든 유대인이든 희랍인이든 로마인이든 모두가 이민족을 낮잡아 취급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무리 베어내고 짓밟아도 꿋꿋이 자라나는 잡초처럼 생명력이 질기고, 더러는 자신들을 삼켜버렸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유대 국가도 아시리아에 무너지고, 끝내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던 로마는 게르만 이민족에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민족에 대한 두려움의 대표적인 발로이다.
중국은 자신이 천하의 중심이고, 동서남북을 각각 오랑캐가 둘러싸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들이 붙인 오랑캐의 이름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다. 이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마찰하면서, 때론 복속시키고 때론 점령당한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중국에게 우리는 불편하고 두려운 이민족이었다. 매우 호전적으로 비쳤다. ‘동이’의 한자 ‘오랑캐 이(夷)’의 상형은 ‘큰 활’이다. 이를 파자(破字)하면 큰 대(大)와 활 궁(弓)이다. 농경 민족인 중국인들이 봤을 때 동이는 큰 활을 자유자재로 쓰는 무서운 수렵 민족이었다.
맥국 맥(貊)은 ‘갖은 돼지 시’ 변을 붙이고 있다. 짐승 이름 맥(貘)이나 오랑캐 맥(貉)과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상통한다. 특히 짐승 이름 맥(貘)은 표범의 딴 이름이고, 오랑캐 맥(貉)은 담비와 오소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저돌적 성향의 거칠고 강인한 민족이란 뜻이다.
이런 민족과 직접 대결하기는 버거웠다.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두 차례 침공했지만 을지문덕 장군에 처절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결국 나라까지 무너져 당(唐)왕조에 넘겨준다. 당(唐)의 태종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안시성에 막혀 회군하고 말았다. 결국 한반도의 꼬리에 위치한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우리의 고토(古土)인 광대한 만주지역을 영영 잃어버린 안타까운 장면이다.
그래서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용어가 불편하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순히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이 말고도 서융, 남만, 북적이 있지 않은가. 한데 ‘이융제융(以戎制戎)’, ‘이만제만(以蠻制蠻)’, ‘이적제적(以狄制狄)’이라고는 왜 하지 않는가.
원래는 당 태종이 “예로부터 만이(蠻夷)로 만이(蠻夷)를 공략하는 것이 중국의 형세”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 왔다. 여기에서 ‘만(蠻)’이 탈락하고 ‘이(夷)’만 남았다. 서융, 남만, 북적과 달리 동이족만이 끈질기게 버티면서 존속해 왔기 때문일까.
최근 북핵의 대처 방향을 두고 중국과 한국이 얽히고 설킨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본디 중국은 북(北)으로 남(南)을 적절히 견제하는 정책을 견지해 왔다. 통일된 한국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늘 현상유지 쪽으로 입장을 취했다. 이 또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일환이 아닐까.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로 롯데가 대신 얻어맞은 형국이다. 그들 주장대로 군사적 균형 문제도 있겠지만, 자칭 대국(大國)의 격에 맞지 않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혹시나 남남 갈등을 유발하겠다는 암암리의 계산이 깔려 있다면, 이 또한 이이제이 수법이다.
이를 두고 시시비비가 여전하지만, 한편으론 바람직한 일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군주정이나 독재체제에서 가능하다. 예컨대 일제 식민사관이 동인과 서인 대립을 당파싸움이라고 몰아붙였지만 목을 걸고 ‘아니 되옵니다’라고 외치는, 그리하여 당파의 부침(浮沈)이 계속되는 모습은 현대의 여당과 야당 모습 아닌가.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 눈에는 당쟁(黨爭)으로 보였겠지만, 실제는 당정(黨政)이 아니겠나. 정당정치의 원형 말이다.
정치와 외교에서 ‘갈등’은 질서만큼 핵심 요소이다. 갈등과 질서는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며,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필수 요소이다. 갈등이 없는 정치 외교는 본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억누르고 미봉으로 일관하다가 적잖은 비용을 치르며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전 정권이 결정했든, 현 정권에서 배치했든 사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사안이다. 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한반도 균형자론이나 운전자론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제를 모르는 당랑거철(螳螂拒轍)식 만용이라고 폄하하지만 이이제이(以夷制夷) 반대쪽에 이강제강(以强制强)도 있지 않겠나.
지정학적 불리(不利)는 뒤집어 유리(有利)가 될 수 있다. 강대국의 눈치만 살핀다면 오랑캐 사대주의일 뿐이다. 열강에 둘러싸인 우리의 처지에서는 무엇보다 이강제강(以强制强)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반만년 역사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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