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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교 130년사④] 주물업, 1910년대 허베이성 보터우 출신들이 시작…가성비 앞세워 솥 시장 장악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입력 : 2017-09-14 13:39수정 : 2017-09-14 19:40
아주차이나-인천대 중국학술원 공동기획 처음엔 단둥지역 진출했다 점차 남하 송시 계열·한씨 계열 공장으로 양분 한반도 솥 시장 70% 점유하며 성업 1970년대 들어 쇠퇴…지금은 4곳 뿐

허베이성 보터우시의 양마두조조창(楊碼頭鑄造廠).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주물을 만들고 있다. [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지난 7월 13일 허베이(河北)성 동남부에 위치한 보터우(泊頭)시. 이곳은 중국의 고속철을 타고 창저우(滄州)에 내린 후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중소도시다. 보터우시의 쓰먼춘전(寺門村鎭) 자뎬춘(賈店村)은 시의 중심에서 다시 20~30분 자동차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전형적인 중국의 농촌이다.

이 마을의 가금해(賈金海, 1949년생) 자뎬춘 서기는 멀리서 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한국으로 이주한 증조부인 가광발(賈廣發)씨의 가족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광발씨는 1910년대 당시 조선으로 이주한 후 화교 주물공장의 경영자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몇 개의 주물공장을 경영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구의 쌍화영(雙和永) 주물공장의 경영자로 활동하다 1960년대 세상을 떠났다.

가광발씨는 한국 화교 주물업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아들인 가봉명(賈鳳鳴)과 가봉성(賈鳳聲)씨는 잠시 주물공장 경영에 참가하다가 1980년대 주물공장이 문을 닫자,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가봉성씨는 이민 가기 전 대구화교중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지냈다.

가광발씨가 태어난 곳은 바로 가금해씨가 현재 거주하는 바로 그 집이었다. 그는 어떤 연유로 이 집을 떠나 조선으로 이주해 주물공장을 경영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 화교 주물업 100년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화교 주물공장이 조선에 처음으로 설립된 것은 1910년대다. 보터우 출신의 주물업자가 당시 안둥(安東)이었던 단둥(丹東)에 진출해 쌍합리(雙合利), 복취성(福聚成) 주물공장을 설립하고 큰 성공을 거둔 후 조선에 진출한다.

조선 개항 후 일본과 중국에서 솥이 대량으로 수입됐는데 조선총독부가 이에 대해 수입관세 인상을 하면서 중국에서 이전처럼 수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쌍합리와 복취성은 1910년대 단둥과 마주하는 신의주에 먼저 주물공장을 설립해 솥을 생산한다.

신의주의 주물공장의 솥 생산품이 싼 가격에다 품질도 좋아 조선인 소비자로부터 큰 인기를 끌어 큰 성공을 거두자 점차 남하해 각지에 주물공장을 세운다.

화교 주물공장은 서울, 평양,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12개 도(道) 전 지역에 설립돼 1927년에는 총 46개에 달했다. 화교 주물공장이 주로 생산한 것은 솥, 난로, 농기구였다.

주물업은 기계산업의 가장 기초에 속하는 중요한 산업이다. 철을 용해해 특정의 주형에 넣어 제품과 기계부품을 생산한다. 최첨단의 휴대폰과 자동차도 주물업에 크게 의존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주물업은 일본인 경영의 주물공장이 주로 기계부품과 철도 관련 부품을 생산하고, 조선인 주물공장은 주로 솥과 농기구를 주로 만들었다.

따라서 화교 주물공장과 조선인 주물공장은 솥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주물공장 총생산에서 솥이 3할을 차지할 만큼 솥 시장은 매우 컸다. 조선의 각 농가에게 솥은 필수불가결한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주물공장은 옛날의 대장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화교 주물공장은 수동이 아닌 전동, 목탄이 아닌 코크스와 석탄을 사용해 솥을 제조했다.

조선인 주물공장이 제조한 솥은 크고 밑바닥이 두꺼운 반면, 화교 주물공장의 솥은 작으면서도 밑바닥이 얇았다.

그래서 화교 주물공장 제조의 솥이 열전도율이 높고 가벼웠던 것이다. 가격도 조선인 주물공장 제조의 솥과 비교해 큰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화교 주물공장의 제품이 소비자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 때문에 화교 주물공장은 조선의 솥 시장에서 전체의 7할을 차지하며 큰 세력을 형성했다.

1965년 유성온천에 모인 한국 화교 주물공장의 사장들의 모습.[사진=인천대 중국학술원 제공]


화교 주물공장은 솥을 제조하는 조선인 및 일본인 주물공장보다 3배나 많았다. 46개의 화교 주물공장은 서로 관계가 있었다. 화교 주물공장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큰 본점의 공장이 몇 개의 지점 공장을 경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화교 주물공장은 크게 송씨 계열공장과 한씨 계열공장으로 나눠져 있었다. 송씨 계열공장에는 △복취성과 복취합(福聚合, 이하 공장주 송량명) △복취동(福聚東, 송만명) △쌍화상(雙和祥, 송지명) △쌍화리(雙和利)와 쌍화영(雙和永, 이하 가광발)이 포함된다. 이들 송씨 계열공장의 상호에는 ‘복’과 ‘쌍화’를 공통으로 가지는 공장이 많다.

한씨 계열주물공장은 모두 공장주가 한씨 성을 가진 공장주가 주물공장을 경영했다. 한씨 계열은 △동흥공(同興公, 한문청) △쌍성공(雙成公, 한문원) △영성공(永盛公, 한문생)이 속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모든 공장주의 출신지는 보터우였다. 보터우시는 이전 자오허(交河)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중국 3대 주물산지의 하나다. 보터우시의 주물업은 명나라 때부터 시작, 청나라 때는 ‘주조의 고향’이라는 명칭을 얻을 정도로 발전했다. 1930년경 보터우시의 주물공장은 200개소에 달했으며, 직공은 4000~5000명에 달했다.

보터우시의 명성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 곳의 주물공장은 현재 약 500개가 있다.

보터우시 교하현 신화제(新華街)에 자리한 주물공장인 허베이윤발기계유한공사의 직공 왕요휘(王耀輝, 1951년생)씨는 50년 이상 주물업에 종사한 기술자다.

그는 “어릴 때 각 집에는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 주물제조를 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솥, 농기구, 난로 등을 제조해 판매했다”면서 “보터우 출신의 주물 기술자는 중국 각지에 진출해 그 곳에서 주물공장을 세워 큰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보터우시의 주물공장은 이전의 초보적인 주물제조를 벗어나 최근에는 자동차 부품 등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보터우시의 또 다른 주물공장인 창저우서부특금속제품유한공사의 이사장인 단옥해(段玉海)씨는 “일반 제품뿐 아니라 주물을 활용한 가로등, 각종 예술품 등을 제작해 한국, 일본, 미국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광발씨가 보터우시에서 신의주로 이주한 것은 191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 자본을 투자하는 자본가가가 아닌 노동력을 제공하는 전문경영자로 참가했다.

당시 중국의 회사는 ‘합과(合夥)’라고 불리는 합자회사로 자본제공자와 노동력제공자가 하나가 돼 설립됐다. 가광발씨는 송씨 계열주물공장의 전문경영인으로 발탁됐고, 그의 경영 능력으로 공장이 발전하자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다진 것이다.

화교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은 1930년에 712명에 달했는데 대부분은 보터우시에서 데리고 온 노동자였다.

보터우시는 주물업이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 출신 직공은 어느 정도의 주물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경영자의 동향인이기 때문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조선(한국) 화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8~9할이 산둥(山東)성 출신인데 이 주물공장 종사자만큼은 허베이성 보터우시 출신 화교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송씨 계열주물공장은 신의주의 복취성 주물공장이 본점의 역할을 하고 조선 각지의 계열 주물공장을 산하에 뒀다. 각 계열 주물공장의 수입은 모두 단둥의 본사에 보고를 하고 분배하도록 돼 있었다. 원료인 코크스와 연료인 석탄을 구입할 때는 본사가 일괄해서 대량구매를 했다.

중·일 전쟁 시기 선철 부족과 통제경제로 인해 화교 주물공장의 수는 이전의 3분의1 수준으로 감소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남북 분단으로 인해 단둥과 한국의 주물공장 간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송씨 계열주물공장은 서울의 쌍화상이 본점의 역할을 했다. 화교 주물공장은 해방 직후인 1949년 12개소가 가동되고 있었다.

서울의 쌍화상을 비롯해 같은 계열의 대구의 쌍화영, 부산의 쌍화흥이 있었으며 그 이외 서울에는 화흥, 태흥, 쌍흥이 존재했다. 화교 주물공장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가 좋아 1957년에는 14개소로 증가했다.

이후 1970년대 들어 석탄과 고철 가격이 상승하고 산업화에 따른 농민의 대량 도시 이주로 수요가 감소했으며, 알루미늄을 비롯한 새로운 제품이 등장해 화교 주물업은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에다 화교 공장은 일제 강점기 때와 같은 전통적 제조방식과 경영 방식의 혁신을 하지 못해 정체 상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주물공장은 공해산업으로 분류돼 시외로 이전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공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속출했다. 서울의 쌍화상과 대구의 쌍화영은 1980년대 초 문을 닫았다. 두 공장의 경영에 참가하던 가씨와 송씨 집안 화교는 이때 미국으로 많이 이주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화교 주물공장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부산의 동창주조창(東昌鑄造廠), 창원의 쌍화흥주조창(雙和興鑄造廠), 광주의 동흥주물(東興鑄物)과 대흥주물공장(大興鑄物工場) 4개소가 철강주조업으로 화교 주물업 100년의 역사를 잇고 있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동양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사 및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일본어, 단저)와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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