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45] 무엇이 연승(連勝)을 가능케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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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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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진 = 칭기스칸 푸른군대]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가 일으킨 바람은 중세(中世)세계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폭풍이었다. 엄청난 위력으로 다가와 파괴와 공포를 남기고 지나간 폭풍의 뒷자리에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은 그 폭풍이 어디서 일어나 어떻게 자신들을 휩쓸고 지나갔는지 제대로 알 틈도 없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따져 봐도 그들은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침략의 화신처럼 나타나 정주 문명권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 그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들을 타타르라 불렀을 뿐이다."

라고 기술한 러시아의 연대기(역사기록)만 봐도 그들이 느닷없는 몽골의 출현에 얼마나 놀랐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 실체를 몰랐던 유럽의 의문

[사진 = 전투에 나서는 몽골군]

칭기스칸 시대를 지나 오고타이 칸 시절에 단행된 몽골의 러시아와 유럽 원정도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몽골군의 침공에 유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동유럽의 헝가리와 체코 그리고 폴란드는 몽골군의 말발굽아래 무릎을 꿇었다.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도망 온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몽골군의 공격을 목전에 둔 서유럽은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대칸의 죽음이라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악몽처럼 스쳐간 몽골군이 유럽 지역에 남겨 놓은 것은 공포였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이것이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품었던 의문이었다.
 

[사진 = 몽골 칸 서신 전달받는 교황]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당시 교황 이노센트 4세는 가르피니라는 인물을 몽골에 파견했다.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9세 역시 루브룩이라는 인물을 몽골로 보내 그들이 가진 의문을 풀어 오도록 했다. 그리고 몽골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사진 = 말달리는 아이들]

유럽 뿐 만이 아니라 중동지역을 비롯한 당시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몽골군은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무엇이 그들의 연전연승을 가능하도록 만들었을까?

▶ 몽골도 의아해 했을 연전연승

[사진 = 대몽골 정벌지도]

목축과 사냥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한 민족이,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 수의 군사를 가진 유목민들이 어떻게 무한한 인적자원을 가진 아시아와 유럽의 강력한 문명국가를 짓밟고 초토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푸른 군대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정주 문화권의 사람들만 가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몽골 스스로도 이어진 승전에 의아해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당시의 상황만 가지고 세계 정복의 꿈을 가진 한 인간이 만들어지고 대몽골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 무엇이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을 가능케 한 구체적인 요인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몽골족은 몽골고원에서도 이제 막 등장한 작은 집단으로 그 세력이 강력하지도 않았고 칭기스칸이 된 테무진 역시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유목민 출신에 불과했다. 그만한 야심과 능력을 지닌 인물은 칭기스칸 외에도 적지 않았다.
 

[사진 = 유목민 말몰이]

그런데도 이 같은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 왜 하필 몽골족이었고 칭기스칸이었나 하는 데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그가 걸어 온 길은 적지 않은 부분에서 우연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한 성공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무엇인가 요구되는 것이 있었고 적어도 몽골족과 칭기스칸에게 그 요구조건에 부합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 복합적인 형태로 짜여 진 성공 요인

[사진 = 어린이 씨름선수]

불행하게도 그 것에 대해 남겨진 역사적 기록은 적다. 지금까지 크게 의존해왔던 몽골비사와 중국의 원사 그리고 라시드 웃딘의 집사가 남겨진 기록이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세 자료 모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쪽의 역사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기록은 기록자의 입장에서 침략자의 행위를 비난하는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다 보니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피해자가 편견을 가지고 공격자를 야만인, 학살자로 멸시하며 단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저기에 나타난 파편들을 끌어 모아 무엇이 당시의 그들의 존재와 성공을 가능케 했는지 한번 짚어 보자. 아마 그 성공의 요인은 한쪽 면만으로는 얘기할 수 없고 군사적인 면에서부터 인간 칭기스칸이 지닌 특성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형태로 짜여 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진 = 나무안장]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바탕에 두고 그 요인을 거꾸로 더듬어 가는 방법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이 유목 기마민족이 가진 기동성이다.

▶ 기동력 기마술은 유목군대 공통 특성
속도를 경쟁력으로 삼는 타고난 기동력은 유목 기마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스키타이가 보여준 바람 같은 기마술은 정주민 군대의 기동력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사례를 살펴본 바 있다. 흉노족의 기마술에서 비롯된 용맹성은 끊임없이 중국을 괴롭혔다.
 

[사진 = 유목민 말몰이]

투르크족이기는 하지만 몽골 초원을 장악했던 돌궐 역시 흉노의 기마전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기동력이 둔한 정주민 군대, 특히 중국을 위협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본다면 유목민의 타고난 기동력과 기마술은 칭기스칸의 군대만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시대부터 칭기스칸의 시대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누볐던 유목민 군대가 가진 공통적인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시스템과 마인드의 차이
또 유목민 특유의 병참시스템이나 가벼운 군장, 살상력 높은 병기 등도 다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크게 보면 대동소이 했다. 그런데 유독 칭기스칸의 군대만 그 이전의 다른 어느 유목민 군대보다 더 큰 승리, 계속 이어지는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사진 = 몽골군 사열]

그것은 그러한 장점을 활용하는 방법의 차이나 시스템의 차이 그리고 마인드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요인들을 한번 짚어 보도록 하자. 몽골인들에게 생활화 돼 있는 사냥을 군대 훈련에 접목시켜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 칭기스칸 군대의 특색중의 하나였다.
이것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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